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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Feb 08. 2022

코로나 19, 추억 여행의 시작

하나. 난 싱글이다.

둘. 2016년 8월. 갑작스레 찾아온 암으로 투병 1년 6개월 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셋. 엄마와 함께 살게 됐다.    

 

  그렇게 엄마와 나, 둘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다른 형제는 없고?’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답은 항상 같다. 오빠가 한 명 있으나... 결혼한 아들과 안 한 딸. 누가 더 편할까?)

  포천에 계시던 두 분은 아빠의 병세가 나빠지면서 수원으로 병원을 옮기고 집도 이사를 왔다. 나라도 가까이 옆에 있으면서 아빠도 들여다보고, 엄마의 쉴 시간도 좀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아빠 간호를 하는 동안 부모님의 짐은 이미 내 집으로 이사를 와 있었지만, 그때 엄마는 병원에 살다시피 했고, 나 역시 병원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나르기 바빴다.

  둘이 되고 나니 정리되지 않은 짐이 어지럽혀진 마음처럼 집안 가득 쌓여있었다. 엄마는 지인 하나 없는 나의 동네에, 난 혼자 모든 일을 하다 뭘 해도 둘이 같이하는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성인이 되어 독립하고, 거의 십 년 만의 일이다. 남들은 엄마 집밥 먹어 좋겠다고 하지만(물론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 일로 힘들어하는 엄마를 지켜보며 함께 지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내가 엄마랑 늘 함께 하는 것도... 무엇보다 갑작스레 떠나보낸 가족에 대한 슬픔을 잊고자 둘 다 무던히도 노력했다. 운동과 교회 등으로 엄마의 일상에 스케줄도 잡고, 당연히 나도 교사로서 일상에 복귀.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문득 아빠가 떠오르면 그 이야기하다 울기도 하고,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 반, 엄마랑 더 늦기 전에 뭐든 하자하는 마음 반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기도... 그렇게 혼자에서 둘이 되는 것에 적응이 될 즈음, 그것이 찾아왔다. 코로나19.

  여느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던 겨울 방학. 특별한 점이라면 엄마랑 합치고 나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꽤 길게 내가 집을 비웠다는 점? 동료 교사들과 인도 여행을 다녀온 2019년 1월의 아침. 여행작가 연수에서 만난 샘들과 점심 약속에 집을 나서는데 뉴스에서 무슨 전염병이 돈다고 엄마가 꼭 나가야 하냐고 물었다.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다들 식구들이 걱정했단다. 함께 산책 좀 하고, 밥을 먹고.. 헤어질 때 “신종플루 같은 거 아니겠어? 곧 괜찮아지겠지. 다들 조심히 잘 지내고 다음에 또 봐요!” 했는데 그들은 아직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인도 여행 식구들은 “우리 나중에 뒤풀이 합시다~” 하고 헤어졌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온라인에서만 만나고 있다. 전염병이 아무리 심해도 개학은 하겠지... 했는데 아직도 맘 편히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은 자의 반, 타의 반 집과 직장만을 오가며 고립된 시간을 보낸, 5-6살짜리 꼬마 시절로 되돌아간 듯 엄마랑 종일 붙어산 나의 지난 2년간의 기록이다. 그 시절엔 어린 나를 놓칠까 엄마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따라왔다면, 지난 2년은 나이가 들어가며 조금은 아이 같아지는 엄마를 어느덧 마흔이 넘어버린 딸이 손잡고 이끌며 지나왔다는 점이랄까. 어느덧 나는 엄마에게 딸에서 친구로, 그리고 보호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생판 모르는 동네에 발을 들였다. 집 앞 버스 정거장에 서울 곳곳으로 향하는 버스가 20여 대, 그것도 길어야 5분 기다리면 오던 서울 살던 때나, 늘 아빠가 차로 함께 움직였던 포천 시절과 달리 이곳은 차가 없으면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도 많고, 버스가 있어도 한번 놓치면 15분 20분 기다려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자연스레 엄마들이 자녀를 학원에서 픽업하듯 나도 여기저기서 엄마를 픽업하게 됐고, 코로나 때문에 어딘가 가거나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적으니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졌다. 이런 날 보며 참 효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고 처음부터 그랬을까. 그저 독립해서 살던 때는 내가 먼저 집에 전화하는 경우는 잘해야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끊는 사람이었다. 직장에서 일에 치이고 집에 오면 지쳐 쓰러지거나, 나 좋은 일 하기 바빴던 무심한 보통의 딸이었을 뿐. 기대치 못하게 갑자기 아빠가 암이라는 병을 얻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아쉬움을 남긴 채 아빠를 떠나보내고 나니, 엄마 계실 때 잘하자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좀 이기적으로 말하자면 나중에 내가 덜 힘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주변에서 내게   “너 참 효녀다~” 하는 이들에게 그냥 한마디씩 건넨다.     


  “엄마한테 오늘 전화 한번 해, 여행 한 번 다녀오고. 아빠 갑자기 떠나고 나니 그 별거 아닌 걸 왜 못하고 살았나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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