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빠 산소에 다녀오는 길. 나름 장거리 운전에 피곤하다는 것을 핑계로 구리한강시민 공원에 들러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늘 지나던 길목에 있는 곳이지만 한 번도 들려보지 못한 곳. 코로나 때문에 매점도 간소화되고 사람도 별로 없는데 사방이 푸릇푸릇하니 참 좋다. 공원을 걷다가, 정자에 앉아 쉬기도 하고, 또 걷다가 주차장 한쪽에 꼬리텐트 치고 잠시 누워 엄마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운전이 피곤해서 잠시 졸기도 했나? 그렇게 아빠 방문 및 공원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며 생각하니 문득 아빠에게 미안해진다. 아빠랑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아빠도 대화하고 싶어 했는데… 아빠가 떠나고 난 뒤 이런저런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아빠의 노트에서 ‘대화하고 싶다’라고 적힌 페이지를 본 적이 있다. 텅 빈 노트에 적혀있던 그 여섯 글자가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 아빠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늘 옆에 사람이 있었는데 말하면 되지, 왜 못했을까? 처음엔 그랬는데... 엄마랑 지내다 보니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고, 아빠가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게 ‘자, 지금 시작해!’ 한다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뭔가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야 이야기도 술술 나오는데, 아빠랑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아빠도 그냥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한참 하고 싶지 않았을까? 지나온 삶의 시간을 곱씹어 보며 언제가 힘들고, 언제가 좋았는지, 오늘 날씨는 어떻고, 기분은 어떤지. 그리 특별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아빠가 떠나기 전 어느 토요일, 지인의 결혼식에 갔다가 말없이 부모님 댁을 찾은 덕분에 아빠랑 나랑 단둘이 오후를 보낸 적이 있다. 어쩌다 시작이 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아빠는 자신의 어릴 적,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한 3-4시간 쯤 털어놓으셨다.
"하루는 면목동 H한테 전화를 건다고 걸었는데, 왠 여자가 전화를 받는거야."
"그게 엄마였구나?"
"맞아, 목소리가 참 예뻐서 또 전화를 했지."
"알아, 그 얘긴 여러번 들었지. 내가 라디오에 사연도 보냈었잖아."
병원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던 엄마에게 전화를 잘못 걸었는데 수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에 반해서 매일 전화하다가 엄마랑 결혼하게 된 이야기(이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엄마는 평생직장이 될 수 있었던 병원을 결혼 후에 계속 다니지 못한 걸 아까워 하신다), 결혼하고 나서 엄마와 할머니 사이에서 곤란했던 이야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릴 때 과수원을 해서 어떤 과일이 좋은지, 얼마나 일이 많은지도 신나게 이야기하셨다. 그러다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혼으로 겪어야 했던 슬픈 과거사도 듣게 됐는데, 참 마음아픈 이야기들이다. 양육비를 가로챈 친적들, 매정하게 돌아서던 할아버지의 뒷모습... 아빠가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정도로 나름 똑똑했기에, 할아버지는 계속 공부 잘하면 데려다 키우겠다며 마음대로 아빠를 유명 사립학교로 전학시키기도 했다고 했다. 선행학습을 엄청나게 한 아이들, 촌지를 바라는 교사들, 전학만 시켜놓고 무관심했던 할아버지. 담임이라는 사람이 70여 명 아이들 앞에 성적 안 좋은 10여 명을 불러 세워놓고 아침 댓바람부터 따귀를 올려 붙이며 내질렀던,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는 한마디.
“니들은 대체 어떡할거냐!”
성적이 나빠서 지도한다는 것은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고, 여기 다니는 거 보면 알만한 집 자식들인데, 니들 부모는 왜 안 오냐(촌지가 안 들어오냐)는 의미였다고. 지금은 큰일 날 소리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학교에 상담 온 엄마에게 당당하게 촌지를 요청하는 선생들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때는, 게다가 모두가 주는 학교에서, 안주는 몇 명 중 하나였으니 아빠는 얼마나 눈치가 보였을까. 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던 아빠였는데, 그렇게 새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적도 떨어지니 이래저래 바보 취급당하고, 구박당하고... 남들이 뭐라 하지 않아도 갑자기 뒤바뀐 환경에 엄청난 자괴감이 밀려왔었다고 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일찍부터 가장 역할을 하느라 힘들고 고달팠던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은 한참 계속됐다. 남의 눈 피해 대리인을 통해 생활비를 전해줬던 할아버지,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하기에 자존심은 상하지만 월급날마다 그 대리인 집을 찾아가 손을 벌려야 했던 남자아이.
"한번은 내가 (할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온몸에 가스통을 메고 다 죽자고.."
"응?그렇게 하고 찾아갈 생각을 한 적이 있는거야?"
"아니, 내가 진짜 가슴에 두르고 갔다니까. 어떻게 그리 모른척을 할 수가 있는지 화가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난 본 적 없는 할아버지란 분은 아마 재력이 꽤 있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자식들을 모른척하니 쌓였던 설움이 폭발했던 모양이다.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였는데, 내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다행히 큰 불상사는 없었나보다. 언뜻 들으면 시대극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일들을 아빠는 참 많이 겪고 사셨다.
자신에게 견디기 힘든 삶을 선사했던, 가정을 버렸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닮지 않으려고 아빠는 그렇게 애를 쓰셨던 모양이다. 분명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하다기보다 어려운 편이었지만,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은 꽤 길었다. 매일 아침은 꼭 온 식구가 함께 밥을 먹고, 주말이면 멀리 가지 못해도 손잡고 동네 앞산이라도올라갔다.(식구들과 함께 산을 오르면 내가 크고 작은 나무뿌리나 돌멩이들을 밟으며 ‘이건 한라산, 저건 백두산, 젤 큰 건 에베레스트!’하고 알고 있는 산이름을 몽땅 읊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 세대 남자분들 중에서는 흔치 않은 일인데, 아빠는 항상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도 도와주고, 손수 음식도 만들어 주고(아빠가 만들어준 볶음밥은 재료가 너무 커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여름이면 바닷가라도 한 번 가고.놀러가다 차가 고장나서 차 속에서 쪼그리고 잠들었던 기억도 있다. 무섭고, 엄한, 가끔은 답답한 모습도 있었지만 내 기억 속의 아빠는 가정적인 분이다.
아무튼 그날 그렇게 한참을 말씀하신아빠의 한마디
“아, 좀 시원하다.”
"그러게 우리 오늘 이야기 길게 했네요. 벌써 저녁시간이네."
그때의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아니면 그런 대화를 나눌 날이 앞으로도 많을 거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빠 이야기를 그리 자세히, 오랫동안 들은 것은,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서로의 솔직한 감정을 주고받은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약 한 달 정도 후에 아빠의 병세가 갑작스레 악화되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빠는 다리가 마비되어 걸을 수 없었다. 아빠 혼자는 움직일 수 없었기에 8개월 정도 병원 신세를 지면서 하루종일 아빠 옆에 가족 중 한 명이 꼭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하지 못했다. 그때 우린 아빠에게 그저 약 잘 먹어라, 재활 운동해야 한다, 병세가 어떻다, 뭐가 좋다더라, 뭐는 하면 안 된다 이런 꼭 필요한 말들만 했다. 주로 병원에 머무르며 간병을 도맡았던 엄마도, 주말이면 엄마랑 교대를 했던 나도 심신이 지쳐서 다른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었고, 가끔 들렸던 오빠도 별 차이는 없었을 테다. 아빠는 그런 우리에게 미안해했던 것 같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병원에서 24시간 있는데 이런 이야기나 좀 할 것을... 싶다.
참 아쉽고, 안타깝고, 미안하다. 그나마 당시에 사진 찍기에 빠져있어서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사진도 좀 찍고 작은 사진집 하나 만들어 드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마저 안 했다면, 그마저 못하고 아빠를 보냈다면 정말 마음속에 큰 돌덩이가 남아있을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종종 엄마랑 시간을 보내는 내게 누구라도 “너 참 효녀다~”하면 난 씁쓸하게 이렇게 말한다.
“한 분을 너무 갑자기 잃어서 그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중이지 뭐. 그러니 지금, 전화라도 한 번 더 하고, 찍기 싫어하셔도 사진 한 장이라도 더 찍고, 영상 한 번이라도 더 만들어 둬. 생각해보면 어른이 되고 나서 부모님이랑 사진 찍는 일이 별로 없다? 살기 바빠서 이야기도 많이 못하고. 나중에 그게 참 많이 아쉽고 미안하고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