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단어, 비전공자
주변의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신만의 글을 책으로 쓰고 싶다는 로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손그림에 대한 로망도 마찬가지. 항상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께 비전공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팁을 전해보고자 한다.
하나. 완벽주의 버리기
주변에 이 책을 준비하면서 미술을 전공한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다.
“언니, 대단하다. 바쁜데 언제 이렇게 많이 그렸데. 근데 이건 좀 다시 작업하면 어떨까? 책으로 인쇄하면 좀 깨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 다시 하면 똑같은 느낌이 또 나올까? 난 전공자가 아니잖아. 좀 부족한 대로 하지 뭐.”
“아, 그런 생각으로 해야 하는데. 난 절대 그렇게 못 해.”
“맞아, 나도 내 전공 관련된 거면 이렇게 진행 못 했을 거야. 아니니까 편하게 해 보는 거지.”
사실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다. 뭔가 하나 꽂히면 고치고 또 고치고를 반복해서 잘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던 나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이 너무 힘겹게 느껴졌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조금 시간을 덜 쓰고 비슷한 결과물을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만 인정하면 된다.
‘난 완벽한 신이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그러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어도 넘어가게 된다. 전처럼 완벽을 추구했다면 절대 이 책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전공한 분야가 아닌데, 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큰일 날 것은 없지 않나. (책을 만들기로 하고 꼭 포함하고 싶어서 추가로 그린 그림들도 있고, 정말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다시 그린 경우도 한두 장 있지만 대부분 그냥 그려둔 그림을 삽입했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일단 시작해보자.
둘, 스스로 질문하기
‘나는 언제 즐거운가?’
꼭 해야 하는 일 말고, 남들이 해서 부러운 거 말고, 진짜 내가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잘하지 못해도 하면 즐거운 일이 있고, 잘하지만 할 때마다 스트레스인 일도 있다. 서른이 넘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친구의 말이 너무 멋져 보인 적이 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릴 때 하고 싶었는데 못해 본 일들을 하나씩 해 보기 시작했다. 내가 각종 잡기에 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다 가장 잘 맞는다 싶었던 것이 사진이었는데, 그림을 시작하니 사진이 뒤로 밀렸다. 아마 사진을 찍고 마음에 드는 컷을 고르고 보정하고 하는 과정보다, 내가 직접 그 장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림은 내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공간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리더라도 내 모습만 그릴 수 있다!) 또 디지털 그림도 관심이 가서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역시 손그림이 더 마음에 든다. 글은 워낙 어릴 때부터 틈날 때마다 끄적이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이것도 분야를 잘 잡아야 한다. 내게는 소설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업보다는 나의 일상과 감정을 녹여내는 수필이 잘 맞는다. 동화책이나 소설을 쓰는 분들을 보며 나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적은 있지만,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내게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고통이었다. 진도가 안 나가니 포기할 수밖에. 무언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일단 해 보고, 그 일을 하면서 시간이 빨리 갔는지 혹은 시계만 보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정말 즐거운 일이라면 아마 자신도 모르게 매일같이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할 것이다.
셋, 일상 기록하기
글이든 그림이든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다면 그 순간을 잘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바쁜 일상 속에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바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루하루의 기록이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하루를 기록할 방법이 참 많다. 개인적으로는 사각사각 연필 소리 내며 연습장에 글씨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환경 문제도 있고, 그마저도 귀찮고 할 시간이 없을 수 있다. 그럴 때 활용하기 좋은 것이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녹음이다. 기분 좋을 때, 우울할 때, 슬플 때...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순간을 찍고 녹음해 두면 도움이 된다. 사진도 인물의 얼굴이 드러나게 찍을 수도 있고, 손이나 발, 그림자만 찍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의 감정이 기억될 수 있다면 어떤 장면을 찍어도 좋다. 사진보다 동영상 촬영이 더 생생한 기록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쓰고 싶은데 번거롭게 느껴지거나 차분히 글을 쓸 상황이 안된다면 휴대폰의 녹음 기능을 활용하면 좋다. 언제든 자신의 기분을 음성으로 기록하면 된다. 어떤 장소에 갔을 때 편안하게 해주는 자연의 소리가 들린다면 바람 소리, 물소리를 녹음하며 끝에 “아, 기분 좋다” 한마디만 남겨도 충분하다. 요즘은 휴대기기 대부분에서 음성-텍스트 전환 기술이 적용되어 있어 녹음만 하면 바로 문자로 바꿔주기도 한다. 하다 보면 어떤 발음은 제대로 글이 되고 어떤 것은 영 엉뚱한 단어가 되기도 해서 발음 연습, 전달력 강화 연습에도 도움이 된다. (여기서도 전달력을 따지다니 교사의 직업병이 발현되는 순간 ^^;)
넷, 시간 확보하기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취미 생활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바빠서 할 시간이 없다. 포기해야 할까? 매일 못하면 어쩌다 한 번이라도 할 시간을 만들면 된다. 나의 경우, 작년에 고래학교 그림일기를 운영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자주 그리면 좋겠지만,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모든 일을 미루고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과연 한 달에 한 번이 충분할까? 질문을 던지고픈 분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자투리 시간을 좀 더 활용하면 된다. 내가 직접 그리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그림이나 그리는 과정을 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날에는 여행 드로잉 책을 읽기도 하고 각종 SNS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올려준 영상을 보기도 한다. 점심 먹고 차 한잔하며 투자하는 5분, 10분도 쌓이면 내 재산이 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나의 일상을 블로그나 휴대폰 메모장에 기록해둔다. 실제로 이 책에 쓰인 글 대부분은 2년간 틈틈이 기록해두었던 글이다. 또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도 좋다. 작가마다 글을 쓰는 방식이 다르니 여러 사람의 글을 접해 보고 내게 맞는 문체를 찾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사실 성인이 되어서는 책을 생각보다 많이 읽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좀 부끄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어느 정도 읽을 만한 글을 쓰는 것은(그렇다고 믿고 싶다....) 어릴 때 집에 있던 아동문학 전집이며 위인전 등을 페이지를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고, 꽤 오랫동안 일기를 썼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 자연스레 속독을 습득했는지, 나는 책도 빨리 읽는 편이고 글쓰기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다. 오랜 시간 쌓인 읽기와 쓰기가 나도 모르게 스멀스멀 내 삶에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다섯, 그림은 저렴하게, 쉬운 것부터!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현재 내 수준과는 상관없이 거창한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면 당연히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도구든, 소재든 나의 실력과 상황에 맞게 시작해서 익숙해지면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
내가 처음 그림을 본격적으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을 때 사용한 도구는 무려 20여 년 묵은 수채색연필이다. 오빠가 미술 전공자라 집에 굴러다니던 색연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요즘도 잘 쓰고 있다. (‘풀꽃 반지’의 인물 그림)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하며 쓴 도구는 인도 여행을 떠나기 전 구매한 12색 고체 물감과 붓 세트. (‘풀꽃 반지’의 손 그림)만 원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종이는 수채화를 하려면 좀 도톰한 것이 좋기는 하다. 연습 스케치를 할 때는 A4 이면지도 사용하고, 예전에 산 책에서 부록으로 준 스케치 수첩이 두꺼운 편이라 종종 애용한다. (‘대기 중 2’) 그림을 그리다 보니 색에 욕심이 생겨서 좋은 물감을 사볼까도 했으나 좋은 것은 정말 눈 돌아가게 비싸다. 고민하던 차에 그림 그리는 지인에게 문의했더니 고맙게도 나의 빈 팔레트에 물감을 잔뜩 덜어주었고, 더불어 드로잉북도 선물해줬다. 이후 얻은 물감으로 선물 받은 드로잉북에 즐겁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로로 길게 그려진 그림은 대부분 이 물감과 드로잉북 사용) 처음부터 장비를 잔뜩 사기보다는 가지고 있는 재료로 시작해보길 권한다. 잘못하면 망할 수 있다. 엄마와 같이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산 B5 드로잉북은 종이가 너무 얇아서 수채화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래서 색연필화나 펜 드로잉에 주로 활용한다. (‘외갓집 복원 프로젝트’, ‘어느 일요일 하루’ 등) 내게 맞는 종이 크기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남들은 ─ 한창 어반 드로잉이 유행이었던지라 ─ A5 크기(A4 절반 크기)의 드로잉북을 가장 많이 쓴다고 해서 사봤는데 내게는 조금 부담스럽다. 종이 두께가 300g이라 도톰해서 수채를 해도 종이가 울지 않는 것은 좋지만 코튼지 느낌의 종이는 마음먹은 대로 색이 칠해지지 않아 당황스러웠다.(‘불타오르네’) 왠지 채워야 할 공간도 너무 많은 것 같고. 결국 자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 여행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A6 크기(A4 1/4 크기)라 그런지 내게는 이게 딱이다.
그림 소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내가 그릴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감이 붙으면 조금 더 어려운 내용 그리기에 도전해 볼 것을 추천한다. 그림자나 양말 신은 발이 신체 부위 중에서는 연습을 시작하기 좋다. 자신이 좀 붙으면 손, 발, 얼굴 등 조금씩 어려운 부분에 도전하면 된다. 사람 얼굴을 그리는 것은 내게도 여전히 어렵게 느껴진다. 음영을 넣어야 사람 얼굴이 그럴싸해지는데 제대로 음영을 넣으려면 오래 걸리고, 살짝 삐끗하면 영 이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그나마 마스크를 쓴 모습이 많아서 얼굴 그리기가 조금 수월하다. 무엇보다, 꼭 수채화가 아니더라도 자기 취향에 맞게 귀여운 캐릭터나 스틱 맨 형태로 적절하게 상황을 보여주는 표현을 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실제 필자도 책 내용을 정리하거나, 강의 요약, 수업 설명을 할 때도 스틱 맨을 종종 활용하는 편이다. 또 기억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사진을 활용하면 좋다. 한 가지 더 중요한 팁을 더하자면, 칼라사진 보다 흑백사진을 활용해 보면 좋다. 그림이 사실적으로 그려지려면 인물이든 사물이든 음영이 들어가야 입체적인 느낌이 산다. 칼라사진보다는 흑백사진이 그 음영을 구분하기가 쉽다. 스스로 음영을 넣기가 힘들다면 칼라사진을 흑백으로 바꿔놓고 어디에 더 어둡게 하고, 밝게 해야 할지 본 뒤 컬러를 입히면 도움이 된다.
무엇이든 10,000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일만 시간의 법칙이 있듯, 당연히 시간은 많이 투자할수록 좋다. 그렇다고 자신의 업을 버리고 허구한 날 그림만 그릴 수는 없으니(직업을 바꿀 것이 아니라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그림을 많이 보는 것이 좋다. 완성된 그림을 보는 것도 좋지만 그리는 과정을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요즘은 온라인에서 '00 그리기'로 검색하면 온갖 그림 자료들이 쏟아진다. 필자도 틈틈이 다른 이들의 그림과 그 과정을 보고 있고, 스스로에게 혹은 시작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그리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글이든, 그림이든 잘 안되면... 다시 하면 된다.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 자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자. 난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