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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금홍 Jul 20. 2023

나만 볼 수 있는 것

홍콩과 영화와 배우 6

샤오위, 마 잉까이 샹신 니더!(妈应该相信你的!)  


“샤오위, 엄마가 널 믿었어야 했구나!” . 주걸륜이 감독, 주연했던 대만영화<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说的秘密)>에 나오는 대사다. 피아노배틀장면으로 회자되는 영화. 나에겐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노인이 된 샤오위(계륜미)의 엄마가 20년전 딸이 했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었음을 깨닫고는 한탄의 어조로 말하는 장면이다.  “엄마가 널 믿었어야 했구나!”

별 이유없이 그 대사가 좋았다. 종종 감정을 담아 목소리 흉내도 냈다.


중경삼림 골목길에서  헤매다, 와호장룡 대나무 숲을 지나면서 다음엔 어떤 판타지 속으로 들어가 볼까 고민하는데 불쑥 그 대사가 생각났다. ‘샤오위. 마 잉까이 샹신니더. ’


노인분장을 해보는 거다 . 이 장면이라면 어려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다른 계획도 없이 이 장면부터 재연해보기로 한다.  아이라이너로 눈밑에 주름을 그린다. 팔자주름도 더 진하게. 이마에도  한 줄 그려준다. 그러곤 욕실로 가서 치약을 손바닥에 짠다. 앞머리와 귀밑머리에 살살 발라본다.


욕실 거울 저편에 나를 닮은 노인이 서 있다.


아이라이너와 치약을 슬쩍 발랐을 뿐인데, 어떤 노인이 거울 너머에서 날 바라보고 있다.  어려보이려는 건 그리 안되더니, 간단한 분장만으로도 노인의 모습은 이렇게 자연스럽구나. …


삼남극장, 명보극장을 헤매던 고등학생이  삼십년을 건너 거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삼십년을 건너면  거울저편의 그를  만나게 되겠지.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만나게 될것이다.

‘흠….안되겠어.  오늘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더 재미있게 헤매고 다녀야 되겠군. ’


돌이켜본다. 나를 믿어야 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저 거울너머 노인은 현재의 나를 향해 “너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붙들고 있어야 하는걸까?

잠깐 진지해졌다가,


이 영화의 다른 장면들을 끄집에 낸다. 아들의 교복 자켓을 걸치고 건반앞에 앉아 예샹룬(주걸륜 분)이 된다. 인터넷에서 <Secret> 악보를 다운받아 며칠간 뚱땅뚱땅 연습을 한다. 인제 됐다 싶어서 촬영버튼을 누르면 여지없이 틀린다. 이게 뭐라고 떨린다. 수많은 관객,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은 것도 아니다. 파마자 위에 교복을 걸쳐입고, 방 귀퉁이 전자키보드 앞에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무대위 연주자들이 들으면 어이없어서 코웃음이 나오겠지. 다시 촬영버튼을 누른다. 긴장때문에 또 틀린다.


하얀 와이셔츠위에 포장용 부직포를 스카프삼아 목에 두르고 샤오위가  되어 고백한다. “그 애만 저를 볼 수 있었어요. “


영화 속 샤오위(계륜미)는 피아노 연습실에서 발견한 악보를 연주하며 20년을 넘나들었다. 나는 앞머리에 치약 조금 바르고 거울저편의 미래를 넘나든다.


배우의 대사처럼 “나만 볼 수 있는 것”에 기대어 현재의 통증을 잠시 잊는다. 이 진지한 농담에 실없이 웃고, 사소하게 위로받는다.


샤오위, 마 잉까이 샹신 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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