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과 영화와 배우 4
몇 해전, 꽤 여러차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는 작업을 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모으다 보니, 보조 수단으로 대화를 녹음해야 했다. 녹취를 풀어내는 것은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일이다. 묻고 대답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 사투리를 쓰거나, 말이 빠르거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하는 등. 인터뷰이가 가진 언어습관에 따라 반복재생횟수는 달라진다. 구술을 풀어내고 타이핑을 하는 과정도 지난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녹음된 내 목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의 언어습관을 낱낱이 확인하는 것, 내가 만들어내는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 모두 얼굴 화끈거리는 일이다.
인터뷰 영상이나, 대화도중 찍힌 사진을 보는 것은 녹취파일 들을 때와는 다른 이유로 불편한 일이다. 내가 모르는 내 표정을 고스란히 봐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표정만 선택해서 찍는 셀카, 여기보세요! 하나 둘 셋! 하고 찍는 준비된 몇몇 순간. 이것들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순간의 내 얼굴은 모르고 찍힌 사진이나 영상 안의 저 모습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눈에 힘을 주고, 8짜 눈썹을 만들며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상대방의 말을 싹뚝 잘라먹는 습관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왜 그렇게 두 손은 흔들어 대며 말하는지.
쿠팡에서 로켓배송으로 날아온 가발 두 개. 굵은 컬이 들어간 투명한 레몬 빛 가발과 갈색 쇼커트 가발. 써보기도 전에 웃음이 나온다. 이미 즐거운 상태다. 레인코트에 썬글라스, 금발가발의 임청하와 무심한 표정의 4차원 왕페이가 되어 볼 참이다. 인터넷에서 찾은 임청하의 대사를 외우며, 책꽂이 앞에 흰색 배경지를 걸었다. 조명을 켜고, 책상위에 아이폰 카메라를 세운다. 아무도 없는 내 방, 셀프카메라로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침을 꼴깍 삼킨다. 감독의 큐 싸인을 기다리듯 야트막하게 긴장이 흐른다.
첫 번째로 찍은 영상을 들여다본다. 고개를 치켜들고 임청하의 대사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은 어느 한군데도 맘에 들지 않는다. 몇 년 전 인터뷰 작업과정의 부끄러움이 소환되었다. 목소리도, 표정도, 움직임도 내가 들떠서 상상했던 판타지의 재현이 아니다. 분장 매무새를 다시하고, 얼굴엔 이것저것 더 찍어 바른다.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촬영을 반복한다. 화장으로 나이든 얼굴을 가릴 수 없고, 연기는 어설프고, 사운드는 조잡하다. 하… 역시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겨둬야 하는 건가? 슬그머니 가발을 벗는다.
다른 영화로 바꾸면 괜찮을까? 아닐껄! 답정너였다. 며칠간 영화고 판타지고 뭐고 간에 시큰둥 해졌다.
유덕화와 조우정과 여고생과 스무살 여자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영상 편집앱을 열었다. 여러 필터를 들이대보다가 생각했다. 어차피, 장비탓, 인물탓 해봐야 나아질건 없다. 그렇다면, 대놓고 뽀샵질한 화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결정하면 그것으로 오케이다. 다시 신이 났다. 연기, 분장, 소품, 촬영, 편집을 혼자 다 한다는 것에 이런 편리함도 있다니!난데없이 통쾌하다.
‘올로케’ 라고 영화를 재연하는 프로젝트 제목도 붙였다. 현지촬영을 의미하는 올로케이션. 내 방 한쪽 구석으로 촬영을 떠난다. 그야말로 현지 올로케다. 현실세계에 필터를 들이대고, 현실의 자투리는 슬쩍 잘라내고는 어설픈 판타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발딛은 곳은 리얼세계인가 판타지 세계인가.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