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과 영화와 배우 3
무언가에 매혹되어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의미가 되는 경우가 있다. 매혹의 순간을 돌이켜보면, 그 이유가 사소하고 실없는 것들이 많다. 헐리웃영화의 주인공에게 반해서 화학자가 되기로 하는가 하면, 공부와는 담쌓고 지내던 학생이 마음에 둔 여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학업에 온 힘을 쏟기도 한다. 우연히 듣게 된 시간강사의 독일어가 너무 근사해서 독일유학을 가기도 하고, 미술실 앞 복도에서 나는 테레핀유 냄새가 좋아서 서양화과에 진학하기도 한다.
사소하고 실없기로 치면 나도 한마디 얹을만하다.
스물아홉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서른살’ 이라는 나이가 성인의 지표라도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말할 것도 없고, 현실에서 져야하는 책임과 의무도 만만찮았다. 장고 끝에 내린 결론이 ‘미술대학’을 가자였다. 앞으로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이 다시 대학생이 되는 거라니... 헌책방에 가서 고등학교 교과서를 샀고, EBS 특강을 들으며 수능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입시미술학원에 등록을 했다. 수능시험장에서는 시험시간마다 감독선생들이 내 신분증을 한참씩 들여다봤다.
서른살,‘왕언니’로 불리며 미대1학년이 되었다. 미술밑천이라고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는 사실 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미술이 재미있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소하고 소심하게 관찰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얼렁뚱땅 지금에 이르렀다. 따박따박 나이 먹어가며. 웬만한 일들은 모두 쉰살이 되면 하겠다고 미뤄놨다. 쉰이 퍽이나 멀리 있다고 생각했었을 테지.
덜컥 쉰이 되었다. 덜컹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들이-유덕화와 조우정과 여고생과 스무살 여자가- 등 떠미는 걸 못이기는 척, 나는 사소하고 실없는 놀이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허름한 내 일상에 필터를 들이대고 이곳이 판타지 세상이라고 우겨보기로 했다. 자, 그럼 어떤 영화부터 시작해볼까? 기억 속의 영화들을 재연한다니 신이 났다.
하지만, 걸림돌은 의외로 빨리 발견되었다. 80-90년대, 내가 봤던 홍콩영화들은 많은 경우 북경어로 더빙되어 수입되었던 것이다. 중문과 1학년 시절 ‘천장지구’ 비디오가 늘어지도록 돌려보고 또 돌려봤다. 그뿐인가! 카세트테이프에 처음에서 끝까지 녹음해서 듣고 다녔다. 일쩨 워크맨에 철컥 넣어서.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던 대사가 홍콩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최근에 재개봉하거나 넷플렉스에 스트리밍 되는 그 시절의 홍콩영화들은, 영화의 원전 그대로 광동어로 되어 있었던 거다. 이제 와서 영화배우 판타지 놀이를 하겠다며 광동어를 배워야하나? 배우고 싶다고 척척 익혀지면 좋겠지만.....
그리하여, 일단 북경어가 등장하는 홍콩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재연작으로 결정한 영화가 ‘중경삼림’이다. 이 영화는 양조위와 왕페이의 이야기는 광동어, 금성무와 임청하의 이야기는 북경어로 되어 있다.
감각적인 영화장면은 당시에 큰 인기를 얻었다. 대사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금성무의 유명한 대사.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글거리지만, 방송이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패러디 되곤 했다.
‘그녀가 떠난 후 이 방의 모든 것들이 슬퍼한다’며 비누, 젖은 수건, 인형과 대화하는 양조위. 흰색 런닝 바람의 그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리고 마지막장면에서 양조위와 왕페이의 대화. 어디로 가고 싶어요? 라고 묻는 페이에게 "아무 곳이나,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라고 답하는 양조위님! 캘리포니아 드리밍만 들어도 떠오르는 그의 눈빛!
마음 먹은 김에 바로 쿠팡에서 금발머리 가발을 주문했다. 8900원. 제품소개에는 마를린먼로 가발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경찰 663역할의 양조위가 써야하는 모자도 주문했다. 경찰모자 6,700원. 홍콩의 밤거리를 순찰하며 화면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양조위의 등장씬을 차마 내 얼굴을 재연할 수는 없었다. 하여, 경찰모자를 쓴 머리만 살짝 보이도록 편집했다. 밤도 아닌 대낮에.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