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과 영화와 배우 5
나는 한글보다 화투를 먼저 익혔다.
여섯 살 일곱 살 시절, 버스도 다니지 않는 깡촌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다. 화투의 화려한 색감이 좋았다. 한자로 ‘光 ’자가 박힌 화투짝은 그림이 화려해서 더 좋았다. 할머니는 여섯 살 손녀를 데리고 민화투를 쳤다. 그는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하곤 했다. 나에게 ‘가난’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병치되는 개념이었다. 내가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게 될까 두려웠다. 두려움의 배경이 뭐였을까? 어린 내 눈앞에 펼쳐진 가난은 불편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난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혼기가 꽉 찬 동네 언니랑 이집 저집 화투원정을 다녔다. 술만 마시면 아내를 때리는 남편, 그를 피해 도망 온 옆집 아주머니를 할머니의 옷장에 숨겨 주었다. 언니의 파혼이야기, 아주머니를 피신시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마음이 꿈틀거렸다. 마음 안에 담고 있던 이야기를 풀어 놓으면 현재의 질감이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가난은 기본값이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현재를 버티자’는 삶의 태도를 이때 습득한 걸까?
며칠간 중경삼림 이야기 속에서 헤맸다. 이제 다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 물색을 했다. 물론, 내 마음에 1호 홍콩영화는 ‘천장지구’이지만, 이건 좀 아껴야 하지 않을까? 천장지구에는 반드시 필요한 소품이 있다. 아직 안 된다. 그리고 연기나 촬영, 편집을 좀 더 해 보고 도전하기로 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받은 편지를 바로 뜯지 못하는 그런 마음.
조금 더 유연하게 중국어 영화도 좀 둘러보기로 한다.
‘저 배우가 예쁜가? 아닌가? 그건 모르겠는데, 왜 눈을 뗄 수가 없지?’ 와호장룡 속의 장쯔이를 처음 봤을 때 내 느낌이다. 이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아름다운 여배우에 대한 기준을 무력화 시킨 배우. 게다가, 유덕화 만큼이나 좋아했던 배우 주윤발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가!
재연해보고 싶은 장면이 있다. 검은 복면을 한 검객 장쯔이가 주윤발과 대적하는 장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니까 해볼만 하다는 심산이다. 동대문 근처의 작업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완구상가에서 3000원짜리 목검을 샀다. 길이가 꽤 길어서 메고 간 가방에 들어가질 않는다. 애매하게 장난감 목검을 들고 지하철을 탔다. 누군가는 힐끗힐끗 피식한다. 목검을 들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초로의 아줌마라니.
집에 돌아온 아들이 한탄조로 말한다.
“아니, 내가 어렸을 때 놀이공원 가서 목검 사달라고 하면, 한 번도 안 사주시더니!”
내가 머쓱하게 대답한다.
“엄마가 촬영하고 나면 너 줄게”
아들의 옷 서랍에서 검정셔츠를 두 장 꺼냈다. 두건과 복면으로 충분하다. 복면을 하고 칼을 등에 둘러메고 대사를 외운다. 다시 어설픈 판타지 속으로 들어간다.
올로케2-와호장룡, 중국영화 속에서 혼자놀기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