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에서포용으로
아빠를 물어... 수아야
사실 <좀비딸>을 관람하고 나서 이 영화에 대해 리뷰를 할 가치가 있을까란 생각에 글쓰기를 미뤄두고 있었습니다. 그냥 흔한 신파코미디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관객4백만을 넘어서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코믹물 또는 좀비물로만 치부하기에는 영화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가 결코 작지는 않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엊그제 리뷰한 책 <좀비사회학>을 일부러 찾아본 이유도 그와 같습니다. 좀비라는 현상이 우리의 문화에 깊숙이 파고들게 된것은 거기에 담긴 중요한 문화적코드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좀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세상에는 죽은자와 산자만 존재합니다.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마지막날 부활 때 뿐입니다. 하지만 산자와 죽은자의 경계는 우리의 마음속에서만큼은 결코 단순명확하지 않습니다. 죽은자는 죽은자로서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비는 왜 자꾸 살아나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일까요? 좀비의 원래 유래는 죽은'시체'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상실한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부두Voodoo교의 흑마술사가 약물로서 전두엽의 기능을 상실시켜 노예화시킨 사람이 좀비의 유래입니다. 이들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은자와 같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런 전설을 영화에 차용해 죽은자가 부활해 사람을 공격한다는 설정이 좀비영화의 주요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좀비들은 느릿느릿했으나 영화적 요구에 따라 빨라졌고 사람을 공격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좀비는 원래 사람이긴 하지만 좀비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들을 죽여도 아무 관계없습니다. 좀비는 사람을 해치기 때문에 사냥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해를 끼치며 무리지어 몰려드는 좀비는 장벽을 세워 배제하고 처단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좀비는 경계하고 배제해야 할 혐오의 대상들을 상징합니다. 외국인이나 소수자, 빈곤자, 반대진영에 속한 사람들을 좀비라고 부르는 일은 흔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좀비사회학>에서는 '미소녀좀비'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좀비를 단순히 배제할 대상이기보다 우리가 함께 공존하고 품어야 할 존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좀비딸>은 이런 '미소녀좀비'류의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딸이 좀비라면 아버지는 딸을 죽일 수 있을까요? 특히 여성을 위해, 또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언제나 큰 감동을 줍니다. 차라리 딸과 함께 죽기를 선택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희생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좀비딸의 스토리는 자신을 희생해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맥이 닿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영화에서는 좀비들을 일컬어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좀비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며 감염자는 발견 즉시 사살합니다. 사람들은 좀비가 자신들과 다른 부류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죽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좀비가 자신의 가족이었습니다. 타자로만 여겨졌던 좀비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사회는 심각하게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지금은 지역갈등을 넘어서 남여갈등, 세대갈등이 큰 문제로 등장했으며 이 문제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로 수렴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 갈등의 문제는 우리의 가족구성원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좀비화된 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갈등과 혐오가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비딸>은 좀비 소재의 영화이지만 우리의 가족과 사회의 문제가 영화에 잘 녹아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잔잔한 감동과 코믹한 설정의 <좀비딸>은 적어도 내재된 주제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2:1)
현대사회에서 좀비가 주요한 현상으로 떠오른 배경은 사회적 차별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안의 장벽과 편견을 버려야 다른이들을 동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좀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