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브루탈리스트>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위한 고통

빛의 뿌리를 찾아서

by CaleB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노예 상태다


우선 영화 제목의 <브루탈리스트>는 '브루탈리즘'이란 건축양식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브루탈리즘은 1950~1970년대에 유행한 건축 양식으로, 노출 콘크리트와 거친 질감, 기하학적 형태, 기능성 중심의 디자인이 특징인 양식입니다.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거칠고 날것이란 느낌은 영화에서 내내 보여주는 미국 사회의 민낯과 함께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주인공 라즐로의 삶과도 일치합니다.


common_(2).jpeg?type=w1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인내력이 조금 필요합니다. 한 시간 30분의 1부 상영 뒤에 인터미션이 있을 만큼 영화는 장대한 서사를 서서히 전개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는 전혀 지루하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주제의 영화입니다.


common_(8).jpeg?type=w1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해 드립니다. 헝가리의 유대인 건축가였던 라즐로는 나치를 피해 아내 에르제벳과 헤어진 채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에서 그가 처음 본 장면은 '거꾸로' 보인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자신보다 먼저 미국에 정착한 친구 아틸라는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마치 미국에 뿌리를 둔 가족기업처럼 위장한 가게를 운영 중입니다. 아틸라의 소개로 부유한 밴뷰런 가문이 집에 도서관을 인테리어 하지만 해리슨 밴뷰런의 오해를 받고 공사를 중단하게 되고 친구 아틸라도 배신해 공사판을 떠돌게 됩니다.


common_(3).jpeg?type=w1


몇 년 후 해리슨이 라즐로를 찾아와 그때는 당신을 못 알아봤다며 자신의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한 마을의 센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 에르제벳과 조카 조피어도 재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계속된 해리슨의 변덕과 갑질에 자신의 보수마저 공사비에 충당되고 결국은 공사도 중단되고 맙니다. 또한 조카 조피어는 미국 사회의 부도덕함을 지적하면서 새로 건국되는 이스라엘로 떠나 버립니다.


해리슨은 다시 공사를 하자며 라즐로를 불러내고는 성적으로 모욕을 줍니다. 계속되는 고통에 지친 라즐로를 대신해 에르제벳은 사람들 앞에서 해리슨의 부도덕을 폭로하고 쫓겨납니다. 그리고 먼 훗날 노년의 라즐로는 건축예술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치하를 받는 장면으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common_(4).jpeg?type=w1


영화는 한 예술가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을 얼마나 불사르는지 보여줍니다. 또한 그것과 함께 떠돌이 이방인이 다른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도 알려줍니다. 이런 과정은 자신의 나라가 없이 떠돌았던 유대인들의 삶이기도 하고 뿌리를 잃고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의에 의탁해야 했던 사람들의 비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common.jpeg?type=w1


라즐로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건축물을 세울 기회를 잡았지만 사장 해리슨은 오직 자신의 허영만이 중요했고 그 과정에서 라즐로는 철저히 희생당합니다. 이 건축 때문에 라즐로는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해리슨은 그를 모욕하고 이용만 합니다. 그 아들 해리 역시 조카 조피어를 욕보입니다. 나치를 피해 자신들의 나라에 건너온 이방인들에게 이들은 결코 친절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라즐로가 건축가라는 능력이 있지 않았다면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common_(6).jpeg?type=w1


결국 이 모든 수모와 수고를 겪으면서 라즐로는 자신의 건축을 알릴 수 있었지만 마지막까지도 그의 진심은 왜곡됩니다. 조카 조피어가 라즐로의 건축을 시오니즘의 이상이라고 광고했기 때문입니다. 라즐로는 여기서도 그의 진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라즐로의 인생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common_(1).jpeg?type=w1


영화에서는 유대교, 가톨릭, 프로테스탄트라는 주요 교회의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교회인지가 라즐로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세우려고 애쓴 해리슨의 건축물은 결국 교회당이었으니까요. 오직 아름다움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의 본질인 신성神性, 즉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입니다. 그가 빛을 이용하는 건축양식을 추구한 것도 이런 내면의 빛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브루탈리스트>는 껍데기뿐인 종교성보다 내면의 신성을 찾아 헤매었던 구도자의 삶을 상징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common_(7).jpeg?type=w1


*Spirit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전서 3:10-11)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이란 결국 신성을 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통속에 인내하며 빛을 추구하는 삶에서 신성은 나타납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어떻게 평가받을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common_(10).jpeg?type=w1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영화 <살인자 리포트>일그러진 정의와 보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