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혈통사이에서
예술은 총과 칼보다 강하다
영화<국보>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감상하는 내내 안 보면 후회할뻔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의 긴 러닝타임은 하나의 장편 대하드라마를 압축해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순간도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없는 압도적인 서사와 영상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일동포 이상일 감독이 만든 일본 전통예술 '가부키'를 소재로 한 영화<국보>는 인간과 예술, 재능과 혈통, 한 사람의 국보를 만들기 위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복수와 예술혼으로의 승화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저는 '가부키'라는 일본 예술을 처음 접했는데 특유의 일본풍 분위기에 거부감도 있었지만 배우들의 열연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부키'배우는 부자세습의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것이 당연합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야쿠자의 아들이었던 키쿠오는 눈 오는 날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어린 키쿠오는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가부키 가문의 유명한 배우 하나이 한지로의 제자가 됩니다. 한지로에게는 슌스케라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습니다. 둘은 함께 가부키를 배우지만 한지로는 키쿠오가 더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뒤를 이을 배우로 키쿠오를 낙점합니다.
키쿠오는 야쿠자의 아들이라는 출신의 멍에, 슌스케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운명의 멍에 속에서 우정을 키우고 대립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 둘이 ‘재능’과 ‘혈통’, ‘예술’과 ‘복수’ 사이에서 얽히는 이야기를 서사의 중심으로 두고 있습니다. 결국 키쿠오는 오랜 세월 후 최고의 배우인 '국보'에 오르게 됩니다. 키쿠오는 국보 시상의 자리에서 오래전 자신을 사모했던 여인의 딸에게서 자신이 국보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는지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분야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한 사람이 잘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를 위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키쿠오 자신은 힘들고 억울한 인생길이었겠지만 반대로 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수많은 이들도 존재했음을 인생 말년에 깨닫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가 수상소감에서 고백한 어떤 이미지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살해당한 날 휘날리던 '눈'이었습니다. 눈은 아름답지만 허무함을 상징합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그의 노력을 말년에 떠올려 보니 그것은 허무함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눈'의 이미지는 그의 인생의 동기이기도 합니다. 키쿠오의 인생의 시작도, 상처도, 마침도 모두 ‘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키쿠오는 최고의 가부키 배우가 되어 세상에 복수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재능만으로 세습제인 가부키계에서 한지로의 후계자로 세움 받게 됩니다.
한지로는 키쿠오에게 말합니다. "예술은 총과 칼보다 강하다" 키쿠오는 그의 복수심을 예술혼으로 승화하게 되었습니다. 복수심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감정이라면 예술의 감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다운 승화이기도 하지만 모두 허무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을 영화는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허무한 아름다움'의 이미지는 영화신학자 로버트 존스톤의 책 제목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떨어지는 눈처럼 찰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허무하더라도 아름답게 우리 인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요즘 한국 영화가 주춤한 사이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일본 문화의 진격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결국 한 민족과 공동체가 무엇을 아름다움이라 믿는지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영화의 흥행속에서도,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아낸 영화들이 다시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국보>를 보면서 <서편제>가 떠올랐습니다. 훌륭한 한국의 문화 예술을 보여주는 영화들이 많이 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편 103: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