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약에 우리> 장밋빛 회상과 만약의 신학

므두셀라증후군에 대하여

by CaleB


영화 <만약에 우리>는 오래전 영화 <건축학 개론>과 비슷한 플롯과 감성의 영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가슴속 한켠으로 접어두었던 오래전의 감성을 떠올리면서 전개되는 스타일의 영화입니다. 은호와 정원은 그들의 고향 고흥으로 내려가는 버스안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습니다. 고흥은 은호에게 홀아버지가 계신 곳이며, 정원은 자신이 자랐던 보육원이 있는 곳입니다. 그들 모두 자신의 정신적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상대방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설정은 그들의 만남이 단순히 우연적 관계가 아니라 깊은 정신적이고 초월적 관계성을 가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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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서울에 가서도 계속 연결이 되고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만만치 않습니다. 컴퓨터게임 개발자가 꿈인 은호와 건축사가 꿈인 정원은 저마다 상대방을 위해 조금은 자신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해도 성공하기 힘든 경쟁에서 이들은 점점 뒤처지는 것을 느끼게 되고 상대에게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는 이런 사랑과 이별의 공식을 감성 있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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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시는 분들은 누구나 사연은 다르지만 자신이 오래전에 가졌던 추억과 감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안타까운 마음들이 촉촉이 자신을 적시게 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그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진로뿐 아니라 결혼과 애정관계에서도 물을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때 조금만 잘 됐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입니다. 관객들은 누구나 추억 속에 있었던 각자의 '만약'을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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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설정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도전해야 하는 냉혹한 사회에 던져진 젊은이들이 마주칠 법한 현실 말입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마주친 현실의 어려움은 결국 이별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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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가져온 소파는 그들이 이사한 집으로 넣을 수 없는 크기였습니다. 둘이 마주한 삶의 현실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맞이하게 된 이별의 장소는 지하철 문 앞이었습니다. 잠시 잠깐 몇 초 사이의 선택이 그들의 운명을 가르게 됩니다.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은호가 지하철 안으로 뛰어들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망설이는 사이 문이 닫혔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이 운명을 기다렸고 받아들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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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만 세상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만든 상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만약'을 통해서 아쉬움과 상처를 달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산물입니다. 은호와 정원은 헤어졌지만 그들이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나름 좋은 인생을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과 상처는 남아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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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적으로 지나간 과거가 아름다운 것은 '자기보호심리'와도 연관됩니다.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에서 장수한 인물인 므두셀라의 이름을 딴 용어로, 과거의 고통이나 슬픔은 서서히 희석되고 행복했던 순간을 중심으로 기억을 재구성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또는 '장밋빛 회상 (Rosy Retrospection)'이라고도 합니다. 지나간 일은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뇌가 주는 일종의 위로일 뿐일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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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으로 보자면, 이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질문과도 닮아 있습니다. 한 사람은 현실을 감당하려 하고, 한 사람은 관계와 의미를 붙듭니다. 그러나 예수는 둘 중 하나를 정답으로 제시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인간의 선택 안에 담긴 한계를 아시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만약'이라는 틀로 가져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가 예수의 선택이었고 운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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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은호와 정원은 자신들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아픔은 있겠지만 그것이 그들이 가야 할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은 언제나 상처를 통과해 옵니다. 흉터 없는 부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0: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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