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의 '공부 못하는 사람'
농어촌 전형이 적용되는 학교에서 자란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선생님들에게 나중에 사회 나가서 ‘촌티’를 내고 다니지 말라는 교육을 받곤 했다. 예를 들어, ‘학생 수가 몇 명이었는지 말하지 마라.’, ‘거름 냄새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하지 마라.’, ‘탱크가 지나가느라 지각했다고 말하지 마라.’ …… 와 같은 말을 들었다. 반면 다음과 같은 것은 허락되었다. ‘층간 소음 때문에 다툰 적이 있다고 해라.’, ‘빛 공해 때문에 힘들었다고 해라.’……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도시와 시골 중 어느 곳을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교실 안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선생님의 말씀을 다들 공감하고 웃어넘길 뿐이었다. 고등학생 최고의 성취가 ‘인 서울’인 교실에서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골에 비해 도시는 나은 곳이라고 배웠고, 나고 자란 농촌은 벗어나야 하는 곳이라고 인식했다.
대학 내의 농어촌 전형 대학생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 내의 사람들이 사회배려자 전형을 비롯한 농어촌 전형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전형에 비해 1~2등급 낮은 성적은 ‘정당하게’ 공부해서 합격한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공부도 못하는데 자신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이 ‘역차별’이고 ‘특혜’라고 생각한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만 들어가도 농어촌 전형에 대한 비하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는 입시 결과를 낮추는 존재이며, ‘공부 잘하는 사람’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들이다. 이 때문인지 농어촌 전형으로 합격한 대학생들은 자신의 출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어떤 전형으로 들어왔는지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거나 대답을 회피하기도 한다. 아마 자신을 특혜를 받은 사람, 혹은 공부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이 싫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농어촌 전형 대학생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대학생 인터넷 커뮤니티 ‘캠퍼스 픽’이나 ‘에브리타임’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2020년 중순에 에타에서 봤던 글을 아직도 기억한다. 몇 년 전 일이라 완벽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학우가 성적이 낮아서 고민하는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 그 글에 누군가가 “네가 농어촌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상 고등학생 때 했던 만큼만 해도 3.5는 넘음.”이라고 남겼다. 댓글을 쓴 사람은 별생각 없이 그런 글을 썼겠지만, 당사자로서 농어촌 전형이면 공부를 못할 거라는 인식이 속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억울했다. 농어촌 전형이지만 나는 잘 따라가고 있는데. 성적 장학금도 받는데…. 나는 이후 에타에 ‘농어촌 대학생을 차별하지 말라’는 글을 올렸다가 빠른 속도로 삭제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나의 전형을 거짓으로 꾸며내는 편은 아니다. 먼저 나서서 말하지는 않지만, 물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답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최선을 다해 과거 내가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 현재의 나는 뭘 해냈는지 덧붙여 설명한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고, 지역 신문을 만드는 활동도 했으며, 정치 토론부 부장이기까지 했다. 지금의 나의 성적은 4.0이 넘고, 성적 장학금도 두 번이나 받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의 성취를 늘어놓는 이유는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함이다. ‘비록’ 내가 농어촌 전형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보통’ 전형 못지않게 많은 활동을 했고, 이 학교에서의 나는 잘 해내고 있다고.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서 나 또한 농어촌 전형을 떳떳하게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즉, 나 또한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은 차별받아도 괜찮은 사람이며, 스스로 농어촌 전형은 공부를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앞서 차별적인 댓글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농어촌이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 나의 이러한 인식은 사회적으로 학습되었다. 이 생각이 또 다른 차별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했다.
대학에 합격한 후 나는 가족과 주변 친구들에게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인 서울 대학에 합격하면 훈장처럼 주어지는 사회적 인식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에게는 농어촌 전형 출신 합격자라는 점 때문에 기준 미달이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대학 하나로 내가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아니라고 평가한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출신을 숨겨야만 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사람의 기준마다, 어떤 분야인지에 따라 모두 다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하나의 통일된 기준이 있다고 믿곤 한다. 예를 들어, ‘인 서울’을 하되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합격한 건 아니어야 하고, 그 안에서 높은 성적으로 졸업해야 한다. 또한 유명한 직업을 가져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보통 사회적으로 여겨지는 성공의 조건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의 조건과 일치하는 구석이 많다.
그런데 공부를 잘하는 사람,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누가 만들었을까? 예상하건대, 공부 잘하고 ‘성공’한 사람이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그 외의 사람들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이는 사람을 교묘하게 차별하는 근거가 되며, 존재하는 사람을 숨게 만든다. 또한 자신에게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약자는 늘 온갖 설명을 통해 강자를 설득해야만 인정받는다. 하지만 나는 의문이 든다. 이런 짓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는 왜 존중받을 수 없을까? 나는 언제까지 나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할까. 공부를 못 한다는 것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공부를 못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차별받아도 되는 사람을 의미하므로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사람은 모두 다양하고, 존중받아야 마땅한데 무언가 해내고 이뤄야만 인정받는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사람의 의미와 기준부터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누군가 차별해도 괜찮은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차별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