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타작을 하며
텃밭 농작물로 콩을 처음 심어봤다.
마사토 밭이라 퇴비도 많이 주고, 김도 여러 번 맸지만 여름내 자라도 콩포기는 난쟁이였다.
그 덕이겠다. 무성하게 자라 고라니 놀이터가 되어버린 이웃 콩밭과 달리 우리 콩밭은 고라니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고라니 성에도 차지 않았던 초라한 콩포기였는데, 가을바람이 불자 콩주머니가 제법 다닥다닥 붙기 시작했다.
소출이 좀 나겠다 싶었다. 콩깍지가 누레지자마자 옛날 콩서리하던 기억이 떠올라 몇 포기 꺾어 콩맛을 보았다.
기분이겠지만, 내 손으로 키운 것이라 그런지 유난히 고소했다.
콩을 꺾어 말리는 동안 잦은 가을비로 잘 마르지 않아, 타작할 날을 잡는 것도, 타작할 방법도 난감했다.
타작할 궁리를 하다가 옛날의 타작마당을 떠올렸다.
가을걷이를 위해 흙마당을 파헤쳐 반죽을 해 다지고 말려 만들던 타작마당, 그 위에서 도리깨가 휙-휙- 허공을 가르던 소리. 마당 구석 갈라진 틈에 박힌 곡식 낱알들을 우리 형제들이 일일이 줍던 장면까지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물론 이제 그런 마당을 만들지도 않거니와, 추수할 양도 그렇게 많지 않으니 그럴 필요도 없다.
밭 한가운데 둥글게 터를 잡고, 고춧대를 박아 비닐을 둘러치고, 바닥에 널따란 야외용 돗자리를 깔았다.
도리깨 대신 집에서 굴러다니던 기다란 커튼봉으로 콩대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커튼봉으로 내리쳐도 콩깍지는 잘 터졌다. 문제는 콩알이 튀어 비닐 밖으로까지 날아가는 놈이 많은 것이었다.
울은 낮고, 지붕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흩어진 콩알을 주우며,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옛말과 “하늘이 주신 복이니 어찌 먹지 않으랴” 하며 독이 든 콩알로 꾸벅꾸벅 다가가던 《장끼전》장면을 떠올렸다.
나도 그 장끼처럼, 콩알을 남김없이 주워 담았다. 처음 지은 콩이라 그만큼 귀하게 여겨졌다.
콩대를 계속 두들기다 보니 팔이 아팠다.
내 거친 숨소리에 옛날 타작마당에서 도리깨질하시던 아버지의 ‘휴—휴—’ 하시던 숨소리가 겹쳐지는 것 같다.
뒤늦게 텃밭 농사를 지으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에 젖을 때가 많다.
어머니가 이고 오신 새참을 맛있게 드시던 모습, 쟁기질하며 “이랴, 이랴—” 하시던 우렁우렁한 목소리, 흐르는 땀을 머릿수건으로 훔치던 투박하게 생긴 넓은 손등, 그리고 어느 여름날 물탄 막걸리를 기분 좋게 들이켜던 모습--그 죄송스러운 이미지도 생생하다.
그 해 여름은 가뭄이 무척 심했다.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도록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논가 개울을 파고 물을 모아 파래로 퍼 올려야 했다. 그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행둥골 볏논에 물을 푸시던 아버지가 “막걸리 한 주전자 사 오너라” 하셨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평소 술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던 아버지가 그날은 진이 다 빠지셨던 모양이다.
단촌 시장 입구에 있는 술도가까지 20여 분을 걸어가 막걸리를 받아오는 길.
땡볕에 목은 타들어가고, 막걸리에 대한 호기심도 일어, 나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빨아 마셔봤다.
맛이 싫지 않았다.
조금 마시고, 냇물을 움켜 주전자를 채우고, 또 조금 마시고 다시 채우고….
결국 물 반, 막걸리 반이 된 주전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아버지께서는 그 막걸리를 아주 맛있게 들이켰다.
아버지가 다 마시는 동안 나는 고개를 숙이고 김을 열심히 매는 척해야 했다.
그날을 떠올리면 언제나 얼굴이 화끈거리고 경황없이 아버지를 보내드린 게 후회스럽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쯤 아버지와 옛날 얘기를 나누며, 그때 일을 말씀드렸다면 얼마나 '허허'하시며 웃으셨을까?
그랬다면 오늘처럼 그날을 추억해도 죄스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어렵사리 1차 콩타작을 끝냈다.
오른팔로 두들겼는데 왼쪽 어깻죽지까지 쑤신다.
오늘 같은 날은, 그 물 탄 막걸리를 한 잔 쭉 들이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