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7월 30일 여행 일곱 번째 날
여행에서 최악의 순간은 이미 지나갔다고, 어제보다 힘든 날은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역시, 여행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드디어 내 배가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쯤 되니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바다가 아니라 화장실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일정이 없는 날이라 숙소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려 했다. 그런데 이건 마치 누군가 미리 각본을 짜놓은 것처럼, 내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오늘은 쉬는 날이야’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한 발 앞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 9시, 평소보다 천천히 조식을 먹었다. 이 여유가 달갑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무려 다섯 번. 화장실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절박했다. 이쯤 되면 내일 예정된 섬 투어를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분명 선베드에 드러누워 햇볕을 즐기는 그림 같은 하루를 상상했건만, 현실은 화장실 반경 1미터 안에서만 안정을 찾는 신세였다. 결국 오전은 설사로 통째로 날려버렸다. 낮 12시가 되어서야 약국에 달려가 지사제를 사 왔다. 작은 하얀 알약이 오늘 하루의 구원자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다행히 아이들은 전날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큰아이가 피자가 먹고 싶다 해서, 우리는 근처의 Art Rolling이라는 피자집으로 갔다. 화덕에서 막 구워 나오는 피자라니, 이쯤 되면 기대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막상 입에 넣은 아이가 아니란다. 지난번 My Warung에서 먹었던 마르게리타와 똑같은 메뉴였는데, 맛은 My warung이 훨씬 맛있었다고 한다. 고놈의 입맛이란, 참 예측 불가다. 나는 속이 안 좋아 수프를 주문했는데, 나와버린 건 뜻밖에도 브로콜리 새우 덮밥. 순간 ‘먹으면 안 되겠다’는 이성이 속삭였지만, 주문해 놓고 손도 안 대기는 애매했다. 결국 한 숟갈, 두 숟갈 떠먹으며 속으로는 계속 후회했다.
다행히 약이 조금은 통했는지, 오후에는 두 번 정도로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어 숙소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다 결국 또 잠이 들었다. 아이들은 휴대폰에 파묻혀 세상과 단절된 채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공부라도 시켜보려 했지만, 애들은 미적거리고 나는 힘이 빠져 금세 포기했다. 여행 중 부모와 아이의 기싸움은, 늘 부모의 완패로 끝난다.
오후 5시가 되자 문득 누사페니다의 선셋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극찬한 노을이라니, 놓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자’고 마음먹는 순간,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 장대비를 퍼부었다. 이번 여행의 타이밍은 어쩐지 늘 엇나간다. 남편이 스쿠버다이빙을 마치고 오면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템플링 비치를 가자고 했던 계획도 내 상태 때문에 이미 접은 터였다. 결국 오늘은 ‘아무것도 못 한 날’로 기록될 듯했다.
비가 거의 그치자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오늘은 Kompyang Cottage 예약 전 고려했던 Laroja Bungalow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분위기는 지금껏 누사페니다에서 갔던 식당들보다 한층 세련되어 보였고, 카드 수수료까지 받지 않아 마음이 한결 들떴다. 그러나 기대는 역시 실망으로 돌아왔다. 큰아이가 주문한 치킨윙은 맛이 없다고 했고, 급히 추가한 봉골레 파스타마저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나는 속을 걱정해 버섯수프를 주문했는데, 이번엔 ‘버섯국’이 나왔다. 국물은 따뜻했지만, 마음까지 데워주지는 못했다. 둘째가 주문한 오리고기 크리스피덕은 잡내가 심해 손이 잘 가지 않았고, 마지막 희망은 남편이 주문한 씨푸드 플래터였다. 하지만 그것조차 40분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5분만 더요.”라는 말은 세 번이나 들었고,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떠나는 걸 보며 결국 포기하려는 순간, 허둥대며 음식을 가져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씨푸드 플래터는 맛있었다. 하지만 그 맛을 보기까지의 여정이 너무 길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미리 먹었던 지사제는 별 효과가 없었다. 다시 두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와야 했고, 여전히 배는 아프다. 내일 예정된 투어를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면서도, 이상하게도 작은 기대가 남아 있었다. 이놈의 무한 기대감이란. 혹시 드라이버가 늦거나 아예 오지 않을까 싶어 예약한 마이리얼트립에 문의했지만, 돌아온 답은 드라이버 정보조차 알려주지 않는 성의 없는 안내였다.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이번 발리 여행. 하지만 돌이켜보면, 여행에서 완벽하게 흘러간 날보다 이렇게 우여곡절 가득한 날이 오히려 더 오래,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법이다. 오늘의 고생도 언젠가 웃으며 꺼낼 수 있는 추억이 될까. 나는 여전히 배를 부여잡은 채,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잠들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