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 억류
구매 한 건으로 2만 불을 건지게 됐다. 무길은 휘파람을 날리며 캠프를 향해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식사 시간 맞추기가 빠듯했다. 그는 두 번이나 늦은 전과가 있어 주방 사람들 눈치꾸러기가 됐다. 첫 번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두 번째 늦었을 때는 주방 사람들이 ‘우리도 일 끝나고 쉬어야죠!’라며 투덜댔는데, 또 늦으면 할 말이 없었다.
담맘 시에 들어서는 교차로에 막 진입하려는데 신호가 노란불로 바뀌었다. 그냥 통과할까 하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앞으로 밀려 나갔다. 뒤따라오던 차가 미처 정차를 못 하고 그의 차를 받은 것이었다.
‘에이, 급해 죽겠는데···’ 차에서 나와 보니 트렁크가 움푹 들어갔다. 뒤차는 픽업이라 헤드라이트 유리가 깨진 정도. 한데 뒤차 사람들은 나와 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차 안에서 수군대고 있었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어. 무길이 괘씸한 생각이 들어 다가가 한마디 하려는데, 그제야 파키스탄인으로 보이는 작업복 차림의 젊은 남자 둘이 꾸물거리며 나왔다.
그러더니 하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들이 오히려 삿대질을 하며 화를 내는 게 아닌가!
“아, 이 친구야, 과속으로 달리다가 급정거하면 어떡해!”
둘 중 큰 녀석이 소리쳤다.
무길이 기가 탁 막혔다. 똥 싼 놈이 큰소리친다더니 뭐 이런 인간이 있나.
“아니, 그럼 신호 위반하고 그냥 가란 말이오?”
“파란불에 가는 게 왜 신호 위반이라는 거요?”
“아 저것 보면 몰라? 빨간불이 보이지도 않아?”
“그건 지금 막 바뀐 거지. 조금 전까지 파란불이었잖아. 여기 증인도 있는걸.”
큰 놈이 작은 녀석을 가리켰다.
젠장, 신호야 붙잡아 매 놓는 게 아니니, 두 놈이 우겨대면 어쩔 수 없는 일. 잔꾀 부리는 녀석들이 더욱 괘씸했다.
“그래, 파란불이었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뒤에서 받은 사람은 할 말이 없는 거야.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았잖아, 이 친구들아.”
이제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겠거니 했지만 그들의 떼거지는 갈수록 요지경이었다.
“안전거리? 그게 뭔데?”
이번에는 작은 녀석이 나섰다.
“우린 그런 거 몰라. 어쨌든 그쪽 잘못이야.”
다시 큰 녀석이 나섰다.
무길은 기가 막혀 놈들 상판대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우리 경찰에게 갑시다. 누구 잘못인지.”
두 녀석이 동시에 저편에 있는 경찰 초소를 가리켰다.
경찰? 순간 무길은 아킬레스건을 찔린 듯 움찔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경찰에게 가면 면허증을 제시하라고 할 게 아닌가.
“······”
“아, 경찰에게 가자니까. 당신 잘못인지 우리 잘못인지.”
“······”
“잘못이 없는데 왜 못 가는 거야?”
녀석들 기세가 등등해졌다.
망할 놈들. 아까 차에서 나오지 않고 수군대더니 바로 이 수작을 꾸몄구나.
“우리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고. 당신도 지금이 라마단이란 걸 알고 있잖아. 일을 빨리 끝내자고.”
하는 꼴을 보면 평소보다 더 잘 처먹고 더 잘 마신 놈들처럼 씽씽하기만 했다. 라마단을 지키지 않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하튼 작전상 후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듯.
무길이 180도 태도를 바꿨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했다.”
녀석들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당해졌다.
“그럼 잘못을 인정하는 거지? 나중에 딴소리 안 할 거지?”
이젠 수세에 몰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 가지 걱정이 앞섰다. 놈들이 내 약점을 이용해 금품을 요구하면 어쩔 것인가. 아니, 잘못하면 사태가 그 이상으로 비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위를 맞춰서라도 빨리 끝내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그래. 딴소리 안 해. 내 잘못인 걸 뭐"
무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다친 곳은 없나?”
이번에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물었다.
“괜찮아. 우리가 순발력 있게 대처한 덕분이지.”
놈들은 말을 하면서 웃음을 참느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네. 그럼 나 가도 되지?”
“그래, 가 봐. 앞으로는 아무 데서나 급정거하지 말고.”
녀석들이 목에 힘을 주고 큰 인심을 쓰고 있었다.
무길이 쫓기듯 차에 올랐다. 급히 달려가며 룸미러로 보니, 놈들이 배꼽을 잡고 깔깔대고 있었다.
아니, 얼굴이 하나 더. 갈 때 만났던 경찰관도 그 옆에서 깔깔대고 있었다. 분명 잘못 본 게 아닐 텐데······.
워닝 테이프를 확보한 4공구는 모든 현장 인력을 투입해 철야 작업으로 페널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런 얘기를 재미 삼아했지만, 외국인이 볼 때는 미친 짓이었다. 만일 사망사고라도 내면 살인죄로 처형당할 각오를 해야 하니 말이었다.
워닝 테이프 소동 몇 개월 전에 이웃 현장인 B건설사 직원이 인명사고를 낸 일이 있었다. 사망사고인 데다가 무면허라 극형을 피할 수 없는 상황. 이런 경우 가해자의 생사는 피해자 미망인의 말 한마디에 달렸으니, 법원은 미망인에게 다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부여한다.
1.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음으로 답하라.
2. 유가족의 생계가 막연하니 유가족 부양을 책임져라.
다행히 그 미망인은 2번을 택했단다. 그는 목숨은 건졌으나, 처자식을 고국에 남겨둔 채 현지에 억류돼, 피해자 유가족의 생계를 돌보는 기막힌 운명에 처했다.
이렇게 엄청난 위험에도 불구하고, 헝그리 코리언은 망설임 없이 무면허로 운전대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