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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Oct 23. 2022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편지

열사의 나라

  직원 가족이 보내는 물건― 편지, 사진, 상시 복용 약, 애창곡을 담은 녹음테이프 등― 은 총무부에서 행랑에 담아 신규 발령받은 직원 편에 보내왔다. 지난밤에 온 행랑이 무길 아내의 9번째 편지를 배달했다.     

 

  경호 아빠,

  경호는 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고 있어요. 당신이 한국 있을 때 사준 신발이 벌써 낀다고 하니까요. 가끔 옆집 애는 아빠가 있는데 나는 왜 아빠가 없느냐고 투정을 부린답니다. 아빠가 돈 벌어서 맛있는 것 많이 사 올 거라고 달래면 좋아라 했다가, 얼마 있으면 또 아빠 타령을 하네요. 안쓰럽기 말할 수 없지만 어쩌겠어요. 다 우리 가족과 경호의 미래를 위해 건너야 할 강인걸요. 되도록 많은 시간을 같이 놀아주는 게 엄마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한 달째 34~35도의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올여름이 기상관측 이래 최장기간 이상 고온이라네요. 너무 더우니까 사람들이 집안에 틀어 박혀서 거리가 텅 비었어요. 이 정도 더위에도 사람들이 꼼짝 않는데 45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건설공사라니 상상이 안 되네요.  

    

  그래도 사람들은 중동을 못 가 안달이에요. 지난주에 여고 동창 모임에 갔는데 친구 하나가 내게 매달리네요. 자기 남편이 사우디에 갈 수 있게 당신에게 잘 말해달라고요. 당신이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그곳에 가면 사람이 이상해진다면서요? 너그럽던 사람이 신경질적이 돼서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다투는 경우가 많다는 말 들었어요. 사우디 가면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요.···내 남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네요, 호호.

  폭염과 삭막한 환경에서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열사의 나라에서나마 돈을 벌 수 있으니 불평일랑 말아야죠. 오일 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는데, 우리나라는 호황을 누리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실감 나네요. 당신 대학 졸업하던 해에 오일 파동이 일어나, 신입 사원 합격 취소 통보를 받고 얼마나 황당했던가요. 그때가 우리 연애 시절이었죠?  

    

  참, 급여받으러 회사에 갔다가 필성 씨 부인을 만났어요. 경호 아빠는 에어컨 속 시원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데, 자기 남편은 찜통 같은 더위와 싸워야 하니 세상이 불공평하다며 아픈 마음을 하소연하더군요. 그 심정을 제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당신도 그에 못지않은 힘든 과정을 겪었다는 건 그분이 알 리 없지요.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지만, 그때 당신 일기장 훔쳐보기를 잘했던 거 같아요. 남의 일기는 함부로 보는 게 아니라 당시에는 마음이 켕겼지요. 그래도 그걸 보지 못했다면 내가 당신을 십 분의 일이나 이해할 수 있겠어요?

  3년 동안 교제하면서 그런 얘기 한 번도 하지 않은 당신은 참 무서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부부가 서로의 과거를 공유하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요. 특히 당신 같은 경우에는. 배우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주며 하나가 되는 거 아니겠어요?     


  잔뜩 수다를 늘어놨네요. 이게 다 경호 아빠와 한 시라도 더 얘기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에요. 내가 경호 아빠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하는지 아세요?···맞아요. 소월 시인이 노래했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림자 같은 벗 하나이 내게 있었습니다.’라고.

  당신이 있어 내 생의 의미가 있답니다.   

   

  부디 불볕더위에 몸 건강히 하세요.




 마침 본사 가는 인편이 있어 무길이 서둘러 답장을 썼다.


  사람들은 이곳 생활을 귀양살이라 한다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모래벌판. 이런 삭막한 환경에서 일 년을 하루 같이 일에 파묻혀 지내니 말이오.

   스트레스가 날로 쌓여 가니 기분 전환이 필요한데,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소. 그러다 보니 사람들 마음이 사막처럼 날로 삭막해진다오. 불볕더위가 육체적 한계를 시험한다면, 무미건조한 생활은 정신적 한계를 시험한다고 할 수 있을게요.

  자연환경이나 기후로 말하자면 한국은 천당, 사우디는 지옥이지요. 천국을 떠나 지옥 생활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한국에서처럼 절제된 모습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지요. 전에 없던 언행을 보이니 사람이 변했다고 할밖에.      


  그에 못지않게 힘든 게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성적 욕구 해소책이 없는 것이라오. 여기와 몇 달 지나니 묘하게 직원들 눈이 풀리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이성을 향한 동물적 본능이 드러난 모양이오. 음악을 들어도 여가수 노래만 찾아요. 나도 지난번 시내 나가는 길에 카세트테이프 몇 개를 샀는데, 캠프에 와서 보니 케이스 안 사진이 모두 여가수들 아니겠소. 하하.     


  그렇다고 어찌 이곳에서 일하는 남자들만 힘들겠소. 아이들 뒷바라지하며 꽃 같은 시절을 생과부로 지내는 부인들도 고생스럽기는 마찬가지지요. 그중에도 당신은 다른 집 부인들보다 더더욱 힘들 걸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요. 남들은 해외 급여니까 많을 거로 생각하겠지만, 우리 사주 부금으로 거의 다 뺏기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당신이 안쓰럽고 죄스럽구려.    


  이곳 생활이 귀양살이라 해도 나는 아무 불만 없으니 걱정 말아요. 과거 힘들었던 시절에 비하면 이건 호강인걸. 숙식 문제 걱정 없고, 월급은 황송할 정도로 많으니, 사환이나 노점상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같구려. 산 하나는 올랐지만, 더 높은 산에 오르려고 출렁다리를 건너는 중이라 생각한다오.  


  아버지로서 경호에게 정말 미안하구려. 돈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하고, 외로움을 달래며 지내는 게 우리의 현실이요. 이런 일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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