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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Dec 25. 2022

그런 시절도 있었던가, 보릿고개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달 밝은 밤. 두 친구가 모래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불이라도 지를 듯 끔찍한 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들어 모래밭은 양처럼 온순해졌다.    

 

  “자네 6·25 때 생각나나?”

  불쑥 필성이 물었다.

  “아니. 휴전 후의 일은 생각나네. 휴전 협정이 체결된 다음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입학했는데 학교 건물이 불타버려 교실 대신 천막을 치고 공부했어.”

  무길이 답했다.

  “그랬지. 그놈의 천막도 모자라서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했잖아. 이번 주는 오전반 다음 주는 오후반. 근데 오후반은 젬뱅이 었어. 오후에 지겨운 학교에 갈 생각을 하니, 놀아도 뭔 재미가 있냐 말이야, 젠장.”

  필성은 오후반일 때는 학교에 안 가겠다고 떼쓰다가, 어머니에게 야단맞던 일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시절엔 너나없이 얼마나 어려웠나. 외국 신문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거지가 많은 나라로 보도됐다니까.”

  “거지 나라. 그런 소리 들어 쌌지, 뭐. 미 군용차들이 지나가기만 해 봐. 행길로 쫓아나가 ‘헬로 찹찹, 헬로 찹찹.’ 손 내밀고 악을 썼잖아. 어쩌다 코쟁이들이 먹다 남은 초콜릿이나 껌 같은 거라도 던져줘 봐. 이놈 저놈 서로 줍겠다고 야단법석을 쳤지. 원 참.”

  그들은 비포장도로에서 자욱이 피어오르는 먼지 속을 뚫고 미제 과자 쟁탈전을 벌이던 일을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그놈의 학용품은 어땠나? 썩어질 놈의 연필, 나뭇결이 나빠 깎으면 살점이 덩어리 져 떨어져 나갔잖나.”

  “부러지기는 얼마나 잘 부러지고? 침을 묻혀가며 조심조심 몇 글자 쓰다가는 부러지고 몇 글자 쓰다가는 부러지고. 집에서 연필을 깎아 필통 가득 담아가도 학교에서 또 깎느라 바빴지.”

  “그땐 참 미안했네.”

  필성은 무길도 깎아대기 바쁜데 자꾸만 연필을 빌려달라고 해서, 그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생각했다.

  “뭐가?”

  뜬금없는 필성의 말에 무길이 의아했다.

  “아닐세. 안 가르쳐 줄 거야. 비밀이거든.”

  필성이 혀를 날름하고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이런 친구 하고는······.”

  무길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우리끼리 얘기니까 말이지만, 난 웬 이가 그렇게 많았는지 몰라. 셔츠를 벗어 뒤집어보면 허옇게 이가 깔려있었어. 밤이면 이를 잡아 요강에 버리는 게 일이었지.

  한 번은 운동장조회시간에 겉옷으로 기어 다니는 놈을 뒤에 서 있던 아이가 잡아 보여서 얼마나 창피했던지. 홀아비 자식이니 별수 있느냐 무시할 거 같기도 했고.”

  “어떤 놈은 안 그랬나. 기집애들 머리카락을 들춰보지. 하얗게 서캐가 깔려있었던걸.”

  “그래.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 말씀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려.”

  “뭔데?”

  “휴전 협정 직후 미국 고위층 인사가 방한해 농림부 장관과 농촌을 돌아보던 중 물었다지 않나. 한국의 특산물이 뭐냐고. 장관의 영어발음이 안 좋아 ‘rice(쌀)’를 ‘lice(이)’라고 해서, 미국 인사가 ‘한국이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지 말이 되는 얘기냐’고 어처구니없어했다는.”

  무길이 몸서리를 치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r'과 ‘l'발음을 잘 구별해야 한다면서 말씀하셨지.”

  “아, 그거 말이야! 덕분에 나 같은 망나니도 ‘rice’와 ‘lice’는 중1 때부터 알고 있었지. 하하.”

  “영양은 부족한데 겉에서는 이가 뜯어먹고 속에서는 회충이 빨아먹고, 얼굴이 노랗게 돼서 다녔지.”

  “그놈의 회충 생각하면 지금도 진절머리가 나네. 학교에서 주는 구충제를 먹으면 회충이 꿈틀꿈틀 똥에 섞여 나왔어.”

  “담임선생님은 몇 마리 나왔는지 조사하고.”      


  무길은 요즘 애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뭐라 할까 생각해 봤다. 더럽다고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다고 깔깔대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어느 나라 얘기를 한 거지?”

  “그러게. ··· 아마 우리나라는 아닐 거야.”

  “그럼. 우리나라는 아니지. 아니고말고.”

  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멋쩍게 웃었다.

  “세상 참 많이 달라졌지. 불과 20년 전 보릿고개 시절 얘긴데.”

  “그야말로 격세지감 아니겠나. 또 지금부터 20년 후면 무슨 얘기를 하게 될까?”     


  두 젊은이는 이역만리타국에서 자식 세대가 맞을 세상을 상상하며 생각에 잠겼다. 티끌 하나 없는 하늘에서 수많은 별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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