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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Jan 05. 2023

'넘버르 원'인가, '머슴'인가

한국인에 대한 현지인의 시선

.  “강형, 배관류 중 부족한 품목이 있어. 3공구에서 40mm 엘보(굽은형)와 티(T자형)를 가지러 왔다가 그냥 돌아갔어.”

   자재 창고를 맡은 추기영이 저녁 식사 중 무길에게 말했다.

  “그랬어? 그렇지 않아도 비축을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한발 늦었군.”

  배관류는 상하수도 공사의 주자재이다. 1,000mm 대형관은 제3국에서 수입하고, 중소형은 국산 자재를 반입했는데, 급할 때는 현지 구매로 충당했다. 3, 5공구는 간선도로에 300mm관 매설 공사를 하면서 골목으로 갈라지는 라인을 빼놓기에 중소형 배관이 필요했다.

  배관 자재는 수도관과 수도꼭지를 비롯해 10여 개 품목이 있는 데다가, 품목마다 5가지 규격이 있어 종류가 30가지 이상이나 돼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구매하는 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어, 틈날 때면 일괄 구매해 창고에 비축했다.




  마침 급한 건은 대충 처리한 터라, 무길이 배관 자재상을 찾았다. 30가지가 넘는 품목마다 개수를 세야 하니 많은 시간을 요 했다.

  무길이 점원의 분류작업을 살피고 있는데 매니저의 친구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긴 포옹 뒤, 양쪽 볼을 번갈아 맞대더니, 가슴을 엇갈려 두 번을 부딪치고 난 다음, 다시 포옹하는 길고도 복잡한 인사를 나눴다. 인사가 끝나고 얼마간 대화를 나누던 중, 매니저 친구가 무길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인인가요?”

  “그렇습니다.”

  “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북아시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니저에게 세계 지도가 있느냐고 물었다.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매니저가 사무실에 들어가 낡은 지도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가 펼쳐 놓은 지도상에서 무길이 조그마하게 보이는 한국을 짚어줬다. 매니저 친구는 한국과 사우디 면적을 비교해 보더니, 이번에는 자신과 무길을 번갈아 보며 체구를 비교했다. 몸집이 큰 사우디인에 비해 무길은 현저하게 작았다.

  그가 혼잣말로 중얼댔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이렇게 몸집도 작은 사람들이 어떻게······. ’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국 사람들 참 대단합니다. 한국인도 잠을 자나요?”

  “한국인도 사람인데 잠을 안 자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아니요, 당신들은 잠을 안 잡니다. 밤낮으로 일만 합니다. 24시간 내내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는걸요.”

  그의 찬사는 그칠 줄 몰랐다.

  “대체 무엇이 당신들에게 그런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걸까요?”

  “조상 대대로 물려온 가난의 사슬을 끊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외세에 의존하기도 했고 나라를 뺏기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이젠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야죠.”

  “원유를 채굴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몹시 어려운 생활을 했지요. 이 불모의 땅을 지킨 덕에 알라의 축복이 내렸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당신네들이 그렇게 노력하는데 안 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가 활짝 웃으며 “꼬리, 넘버르 원!”하고 엄지를 세워 보였다.




  배관 상점 일을 끝내고 무길이 페인트 가게를 찾았다. 상점 주인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사우디인과 물담배를 즐기고 있었다. 물속에 긴 호스가 잠겨 있고 연기를 들이마실 때면 방울방울 수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무길이 실내용 녹색 수성 페인트를 주문하자, 점원이 물건을 가지러 점포 뒤 창고로 갔다. 기다리는 동안 무길이 두 손으로 두툼한 책을 받들고 있는 사우디인에게 물었다.

  “코란인가요?”

  무길은 하루 다섯 번이나 쌀라타임을 지키며 엄격한 종교 생활을 하는 무슬림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됐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나요?”

  그가 코란에 관심을 보이는 이교도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무길은, 가정교사 광고를 계기로 기독교인이 됐지만,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장난기가 동했다.

  “종교가 없다니요? 이슬람교가 아니라도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가 있어야지 종교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는 상대 못 할 사람을 대한 듯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종교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는 무슬림에게는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무신론자거든요.”

  “무신론자? 그럼 당신은 신을 부정한단 말이오?”

  그의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믿어지질 않는걸요.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게.”

  무길이 한 번 더 그의 심사를 건드렸다.

  “그럼 당신은 어디서 왔단 말이요! 당신의 부모는 어디서 오고 당신의 조상들은 어디서 왔단 말이요!”

  그가 무길을 노려보며 노여움을 삼키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당신은 신을 보았나요?”

  “이런 고양이처럼 은혜도 모르는구나. 고양이만도 못한 놈 같으니.”

  그가 부르르 손을 떨었다.

  “당장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너 같은 놈은 꼴도 보기 싫어! 남의 나라에 와 머슴살이나 하는 놈이!”

  당장 뭐라도 날아올 만큼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무길은 점원이 내 온 페인트를 받아 들고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람. 섣부른 장난기로 체면이 말씀이 아니었다.···근데, 뭔가 잘못된 거 아냐? 종교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이렇게 모욕하다니.···그것도 그렇지만 잘못이 없는 내가 왜 도망치듯 나왔지?

  결론은 자명했다. 상대는 사우디인, 자신은 한국인. 사우디는 돈이 넘쳐나는 나라. 한국은 가난한 나라, 어떻게든 이 나라에서 돈을 벌어야 했다.···아쉬운 사람이 어떻게 할 말을 다 하고 사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배관 상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분은 정반대였지. 엄지를 세워 보이며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어. 근데 머슴이라니······.


  그냥 무식한 늙은이의 망발일 뿐이라고 무시하려 해도, 그의 말은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속을 긁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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