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책을 지저분하게 읽어라
4장 크로스오버 시대, 허물고 극복해라
책장에 책을 많이 꽂아둔 사람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책을 많이 가진 사람은 왠지 모르게 학식이 풍부한 것 같고, 어느 면에서나 아는 게 많을 것 같아 보였다. 저 많은 책을 아마도 다 읽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나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가지고 있는 책, 책장에 모아둔 책들을 다 읽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개중에는 제목만 보았든지 아니면 목차만 보고 꽂아둔 책도 많을 것이다. 이후 언젠가 필요해서 읽을 책이니 책꽂이에 꽂아두자는 마음을 먹었을 수 있다.
사진=픽사베이
새 책을 사면 어떻게 하든 읽는 게 좋다. 책은 신발과 달리 닳아 없어지는 소모품이 아니다. 한 번 읽으면 그만이다. 물론 좋은 책은 두세 번, 혹은 대여섯 번까지 읽을 수 있지만 아무리 많이 읽더라도 신발처럼 닳아 없어질 만큼 읽지는 못한다. 보통은 책을 깨끗하게 보아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론 초등학교 때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엔 교과서를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하기에 담임이 책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을 강권했다. 책 상태를 종종 검사할 정도였다. 물자가 부족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무엇이든 아껴서 먹고 쓰고 입었던 시기였다. 그때 누군가 책은 더럽히면서 읽어도 좋다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비난받았을 게 틀림없다.
혹자는 읽지도 않을 책들을 책장 가득 모아두는 건 이해가 안 간다며 힐난할 수 있겠지만 책 제목만이라도 훑어보는 것은 아예 책을 읽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또한 시간이 날 때 책을 펼쳐 볼 가능성이 책이 없을 때보다는 높을 것이다. 내가 마음먹고 구입한 책은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다. 독서에도 유비무환의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 정말 단순 취미 차원에서 책을 모으는 사람은 극소수다. 지금 당장 읽지는 않지만 필요한 책이고 언제든 읽을 수 있으니 책장에 책이 있으면 마음 한편으론 든든해진다. 한두 권 책을 모으다 보면 방 안 가득 책으로 채워질 수도 있다. 많은 책을 소장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책 구입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 수는 없으나 가계에 타격을 줄 정도로 무리해서 책을 사지는 않을 것이다.
책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내용 이외의 요소들과는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책을 깨끗하게 봐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저자의 생각이나 주장을 보기 위해서다. 이렇게 본다면 책은 하나의 지식을 담기 위한 형식, 그릇에 불과하다. 형식과 내용을 혼동하면 안 된다. 책을 사거나 빌리는 것은 그 책 자체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책을 집필한 저자가 갖고 있던 아이디어나 주장, 지식 등을 배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책이 아무리 더럽혀지고 찢어지더라도 내용물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습득하느냐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인류는 독서 능력을 체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인류는 책 읽는 능력을 갖춘 뒤 놀라울 지력을 갖춘 존재로 진화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책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미국 터프츠대학교 아동발달학과 교수인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는 자신의 저서 <프루스트와 오징어>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책을 통해 인간은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그렇게 재편성된 뇌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장했으며 그것이 결국 인지 발달을 바꿔놓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잘 읽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사고의 틀을 과감하게 깨부수고, 세상이 제시하는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책을 통해 인생을 바꾼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세상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할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걸어갔다. 최소한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서적 50권 정도는 읽어야 책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독서가들은 일반적인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되며 책에 약간 미쳤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직관의 능력을 갖추는 것은 다른 분야의 책들도 꾸준히 읽어 양보다는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
책과는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 마치 보물 다루듯이 하면 책 가까이 갈 수 없다. 될 수 있는 한 책을 완전히 소화한다는 생각으로 다뤄야 한다. 책은 하나의 그릇이지 그 내용물은 아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형식적인 면이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물이어야 한다. 살이 되고 뼈가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책 내용이다. 저자의 고심 끝에 나온 결과물은 금박 달린 표지가 아니라 글쓴이의 고상한 의식과 아이디어가 담긴 내용이다. 그것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책을 어떻게 하든 내 손 안에 쏙 들어오게 만들어야 한다. 내 손 안에 든 장난감처럼 익숙하게 다뤄야 한다. 그러려면 낙서뿐만 아니라 접거나 찢기도 하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다. 그냥 깨끗하게 보관하는 데 그친다고 하면 책이 나에게 도움이 될 리는 없다. 어떻게 하든 책은 제 역할을 다하고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