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동화 한 편
꿈속 영상이 애니메이션으로 바뀌다.
지난주 금요일부터인가 오랜만에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요즘 시험기간은 학교에서 시험 1시간만 치고 와서 급식만 먹고 귀가한다나... 공부에 뜻이 있으면 좋으련만... 남는 시간을 어디에서 보내는지 어떻게 내 귀에까지 소리가 들리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으련다. 내 인생 살기도 벅차서 남의 인생까지 들여다봐줄 여유가 없다. 타인의 증오와 괴롭힘도 모기의 앵앵거림처럼 멀게 느껴진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잠 속까지 찾아오는 소리에 꿈속 세상은 다른 색채로 바뀌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울산에 사는 언니가 교육전문가로 나오고 그곳에 방문해서 언니의 강연이 끝나자마자 찾아간 내가 인사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언니에게 이야기를 듣는 장면부터 갑자기 뭉크의 초현실주의 색감과 경계선을 컬러링 마카펜으로 입힌 영상이 꿈으로 이어졌다.
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이의 교육에 열성인 엄마의 영화 미저리급 영상이었다.
교육에 열의가 대단한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싫어하는 색상으로 가득한 무언가를 먹이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시어머니의 질책이 이어지자, 갑자기 색상이 바뀌며 몸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의 입으로 들어갈 뻔한 여러 색상의 물결치는 젤리처럼 이어진 무언가(코스트코에서 파는 '프룻 바이 푸트' 젤리가 우정출연했다.)는 시어머니의 반대로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아이의 엄마는 시어머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어머니는 자금만 대시면 된다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 순간 공포영화에 가까운 잔혹애니메이션의 장면이 순화되어 몇 컷만 이어진다. 언니의 이야기 속의 영상만으로 부족하다 느낀 본인은 아이의 컴컴한, 온통 검정으로 바뀐 꿈속 공간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이의 꿈속에서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들어온 아이의 선생님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아이의 엄마에게 잡혀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처럼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장면이 표현된 명화의 한 장면이 연결된 장면이었다. 선생님은 옷이 벗겨진 채 아이의 엄마에게 매질당하고 마지막에 십자가 비슷한 틀에 매달려 온몸이 찢긴 채, 괴력과 마기 충만한 공포스러운 엄마의 손에 끌려가던 중 자신의 검은 색채의 방에서 걸어 나온 아이의 손에 의해 구조된다.
높은 성벽과도 같은 곳에서 선생님을 구하려는 아이의 손에 밀쳐진 아이의 엄마가 추락하며 밝은 빛과 색채가 아이와 선생님을 환히 비추는 것으로 꿈이 끝났다.
새벽에 꿈속 장면에 경악했는지 몸 여기저기가 저리고 빡빡해져 바로 깰 수 없었다. 일어나 앉아서는 꿈을 꾸고 몇 자 남기려는 열의보다 눈앞에 펼쳐진 일상을 간단히 정리하고(새벽 2시경 깨어나서 글을 쓰기까지 1시간 30분 정도 지체된 시간이 있었다.) 기억 저편으로 흩어지려는 꿈을 붙잡았다.
중요 부분만 정리하다 보니 울산언니를 만나기 전 주변의 풍경들은 붙잡을 수 없었다. 평온한 시골풍경과 큰 농장 분위기의 장소였나 도심 속 물이 있는 큰 공원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언니를 만나기 전 꿈은 경계도 없이 기억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잔혹 동화, 공포스러운 분위기지만 유독 색채가 강렬했던 꿈을 짧게 꾼 후, 굳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시도도 안 해서 논리적으로 정리하지 못했다.
꿈속 색채가 풍요로운 건 텀블벅에서 클라우드 펀딩으로 동참해서 받은, 토요일에 배송된 작가님의 책 덕분인 듯하다.
내일인 10월 9일 한글날에는 제대로 자리 잡고 책을 읽으면 잔혹동화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평온한 꿈을 꿀 수 있을까... 새벽이 되어 다시 잠들기 전까지 꿈속 색채와 상반되는 작가님의 따뜻한 색채로 그려진 그림과 글로 가득한 새책이 내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