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스타트업에서 처음 회사생활이라는 걸 시작했을 때는 10평짜리 오피스텔에서 어디서 만들었는지도 모를 데스크톱을 부여잡고 기획안을 써야 했다. 케이스에 든 것이라곤 구닥다리 CPU와 SSD 등이 전부였고 그래픽카드는 없었다. 정확한 파워 용량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350~400W 정도였으면 충분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컴퓨터 부품을 테스트하는 것이 중요한 업이 된 지금도 회사 사무실에는 500W 파워가 굴러다닌다. 하지만 이 파워는 안타깝게도 쓸모가 없다. 테스트나 업무에 쓰이는 부품에 500W 파워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데스크톱에 쓰이는 부품의 전력 소모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CPU도, 그래픽카드도 600~700W를 넘어 850W 이상의 파워를 요구하는 시대다. 장기적으로 데스크톱 시장에는 좋지 않을 것이다.
엔비디아가 RTX 40 시리즈의 대장인 RTX 4090을 발표했을 때 PC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은 세 번 놀랐다. 웬만한 게임기와 맞먹는 사이즈에 한 번. 그런 사이즈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성능에 한 번. 그리고 가차 없는 전력 소모량에 한 번.
엔비디아 지포스 RTX 4090의 그래픽카드 소비 전력은 450W로 공식적으로는 850W 이상의 파워를 권장한다. 그렇다. 500W 파워 하나만으로는 초고성능 그래픽카드 하나 돌리기도 벅찬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1000W급 파워를 사용하는데도 부팅이 안 되거나 사용 도중 데스크톱이 뻗어 버리는 사태도 종종 발생한다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CPU가 소모하는 전력도 만만치 않다. 인텔 13세대 코어 i9-13900K의 소비전력은 125~253W에 달한다. AMD 역시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AMD 라이젠 5000 시리즈의 대표였던 라이젠 9 5950X는 TDP(AMD CPU의 소비전력)가 105W였지만, 라이젠 7000 시리즈는 막내 격인 라이젠 5 7600X도 105W를 소모한다. 플래그십인 라이젠 9 7950X는 170W에 달한다.
이렇게 데스크톱의 핵심 부품인 CPU와 그래픽카드가 더 많은 전력을 소모하게 되면서 소비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일단 새 부품이 먹어치울 전력을 충분히 공급하고도 남을 파워서플라이가 필요해졌다. 단순히 무지성으로 고출력 제품을 구매하지 말고 브랜드와 품질을 더욱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건 덤이다(물론 이건 당연한 거긴 하지만).
또한, CPU의 발열을 잡아줄 쿨러에서도 더 고성능인 제품을 사용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이전에는 공랭 쿨러로도 게이밍 PC를 구성하기에 큰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이보다 훨씬 비싼 수랭 쿨러를 써야 하는 케이스가 점점 늘고 있다.
이는 곧 PC를 새로 업그레이드해야 할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추가 비용이 늘어남을 뜻한다. 이미 CPU와 그래픽카드가 이런저런 문제로 비싸진 상황에서 부속부품도 더 비싼 제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메인보드까지 새로 갈아야 한다면… 암담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 여기에 미쳐 날뛰는 환율이 더해지면서 국내 PC 유저는 숨이 턱 막히는 상황이다.
RTX 40 시리즈의 무지막지한 전력 소모에 놀란 이들은 벤치마크를 보고 또 놀랐다. 전력 효율이 이전보다 ‘개선’된 것이다. 실제로 그래픽카드 벤치마크 결과를 보면 RTX 4090은 이전 세대인 RTX 3090 Ti보다 전력을 덜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MD 라이젠 7000 시리즈 역시 전력 효율은 전작보다 나아졌다. 해외 테스트에 따르면 AMD 라이젠 9 7950X는 멀티스레드 작업에서의 전력 효율이 약 24% 정도 높았다. 새롭게 발표된 인텔 13세대 코어 랩터레이크 프로세서 역시 전성비가 대폭 향상되어 코어 I9-13900K가 이전 세대 플래그십 프로세서와 동일한 성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전력이 ¼ 수준으로 낮아졌다.
그럼에도 많은 데스크톱 유저들이 새 CPU와 그래픽카드의 전력소비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전보다 전력을 더 효율적으로 쓰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 클럭/최대 클럭 등의 퍼포먼스를 끌어올리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절대적인 전력량 자체가 많아진 탓이다.
이번 글에서 기자는 새 CPU와 그래픽카드 때문에 빙하가 무너지고 지구가 황폐화된다는 이야기까진 하진 않겠다. 컴덕 한 두 명이 잠시 그래픽카드 업그레이드를 미룬다고 지금의 기후위기가 짜잔 하고 나아지진 않을 테니까.
더 두려운 것은 지금과 같은 흐름이 계속되는 과정 속에서 데스크톱 시장의 풀이 좁아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이다. 최고의 시스템을 갖추는 것뿐만 아니라 적당히 게임이나 전문 작업용으로 쓸만한 데스크톱마저도 점점 요구 전력과 가격대가 높아지는 상황이다. 그만큼 업그레이드 수요가 장기적으로 줄어들거나 아예 데스크톱에서 노트북으로 폼팩터를 옮겨가는 게이머, 전문가가 더 가파른 속도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당장의 데스크톱 전력난은 ATX 3.0 파워서플라이가 대중화된다면 어느 정도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ATX 3.0 파워서플라이는 PCIe 5.0을 비롯한 차세대 인터페이스에 최적화되어 기존 파워보다 낮은 출력에서도 상당한 사양의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정착하려면 그래픽카드도 ATX 3.0 파워에 잘 맞게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현재보다 더 뛰어난 전력 효율을 위한 기술이 개발되는 한편, 주요 제조사들도 눈에 보이는 성능에 집중할 뿐만 아니라 전력 효율 향상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AMD 라이젠에서는 TDP를 본래 수준보다 낮춰도 성능 저하가 거의 없는 ECO 모드를 지원하는데, 이런 케이스가 더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 어느 때보다 컴퓨터가 필요한 세상이 찾아왔다. 하지만 최근의 데스크톱 트렌드는 PC에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유저의 수를 오히려 줄이는 결과를 불러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850W 파워에도 PC가 돌아가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유저의 수가 지금보다는 적어야 한다. 그것이 (상투적이지만) 지구는 물론 컴퓨터 시장에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