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은 가능한가: ‘미’에 경도된 시대를 건너며

<마음을 따르지 않을 용기>란 책을 읽고 자기숭배의 위험성을 검토하다가

by Godot

사람들은 진정성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실존적 욕구 때문에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자기중심성이 되기도 한다.


“너 자신이 되어라.”


이 말만큼 자주 인용되고, 또 위험하게 오용된 철학적 문장은 드물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도덕의 노예로부터 벗어나 ‘초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기존 윤리체계의 ‘선’을 해체하고, 각자의 삶을 예술작품처럼 창조하라고 외친다. 이 사상은 자유와 창조, 개성의 긍정으로 읽히지만,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오히려 자기중심성의 늪으로 빠져든다.


히틀러가 그랬고, 사드 후작과 미국의 B급 시인 찰스 부코스키도 그랬다. 이들은 모두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진리로 오인한 채,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면서 ‘진정성’을 주장했다.(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하나의 시도와 도전이므로 긍정적인 면도 있다)


도대체 진정성은 무엇인가? 자기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다는 것은 왜 때로 폭력으로 비화하는가?


선과 미, 그 사이의 긴장


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본다.

'선'은 사회적 합의와 윤리, 타인의 고통을 고려한 결정.

‘미’는 내면의 충동, 감정, 취향과 개성의 실현.


진정성은 이 둘 사이의 정직한 줄타기이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기울어질 때, 그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왜곡된 정체성이 된다. ‘미’만 좇으면 자아숭배가 되고, ‘선’만 추구하면 니체가 말한 도덕의 노예가 된다.


이 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이 울린다. 그는 “순수한 사적인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즉, 나만의 절대적 진정성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말이든 감정이든,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상징은 타자와의 공유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진정성은 폐쇄된 자아의 충실함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사회화하고 책임지는가에 대한 태도다.


사례: 두 삶의 궤적

예술가 찰스 부코스키는 거친 언어와 파괴적 자기고백으로 유명하다. 그는 “나는 단지 내가 느끼는 대로 쓰고 마신다”고 했지만, 그 솔직함은 종종 타인을 향한 무책임으로 이어졌다. 그의 글에는 진정성이 있지만, 타인을 배려하는 윤리적 성찰은 결여되어 있다.


반면,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탐구하며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고, 의미를 선택함으로써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했다. 이 또한 진정성의 한 형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립해 가는 방식.


결론: 진정성은 ‘정직한 긴장’이다


나는 진정성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정성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되, 그 목소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지는 않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윤리적 감각이다.

순수한 진정성은 없다. 그러나 조율된 진정성은 가능하다. ‘선’과 ‘미’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 나는 그것을 철학이라고 부른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진리에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머물면 진리가 아니다.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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