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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소스를 물려준 소스통들에 대하여

by 김소스통



나에게 소스를 물려준 소스통들에 대하여.


나는 태생적으로 예민하고 불안한 아이였을까?

이건 아직 답이 안 나왔다. 왜냐하면 엄마의 말에 의하면 나는 참 키우기 쉬운 아기였다고 했다. 부모님은 거주하는 반지하 방과 문으로 바로 연결되는 곳에 봉제공장을 하셨다. 하지만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 두 분 다 밤낮으로 일을 하셨어야 했고

그래서 나는 돌이 지나자마자 어린이집에 맡겨졌다.

말 그대로 나는 애착이 형성될 나이에 부모님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내가 키우기 쉬웠던 이유는 말 그대로 엄마와 붙어있는 시간이 적었어서 아닐까?


내가 극심한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을 때 나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 해결책을 찾아 해결하고 싶었다. 지옥에서의 돌파구를 헤매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하니.


우울과 불안이라는 소스로 가득 찬 소스통은 소스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 특히 생각의 회로가 급변하며 어디로 튈지 모른다. 생각은 극단적으로 빠지고 그로 인해 사고의 오류가 생긴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내가 이렇게 된 게 부모님 탓이구나, 내가 좀 더 괜찮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을 텐데 생각을 했다.


그렇다. 나는 나의 부모님들을 몹시나 사랑함과 동시에 부정했다. 우리 부모님들은 미친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미쳤다는 표현은 안타깝게도 비유가 아니라 직역의 의미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의심과 허언이 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엄마를 의심했고 엄마는 그에 지쳐 아빠와 이혼을 했다. 나는 11살 때부터 아빠와 떨어져 살았지만 우리는 자주 만났다. 엄마는 아빠와 만나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만났다. 어느 때는 1년에 한 번도 못 볼 때가 있었고 어느 때는 한 달 동안 몇 번을 봤을 때가 있었다. 아빠는 서울살이에 지쳐 결국엔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우리는 물리적으로 멀어져 자주 보지 못했고 아빠는 의심과 허언을 넘어서 미쳐가기 시작했다.


보이스피싱이 자신의 핸드폰을 해킹한다고 했다. 핸드폰을 5번을 바꿨다. 김 xx 그 자식이 우리 엄마와 바람이 났고 자기를 미행한다고 했다. 언니랑 내가, 그리고 옆동에 사는 작은 아빠가 자기 집을 빼돌리려고 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욕한다고도 말했다. 불면으로 인해 꿈과 현실을 구분을 못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잠을 자려고 하면 환각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아빠는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아빠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병원을 가보자고 해도 가지 않았고 모든 것에 의심이 심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해서 이상한 소리를 했고 나와 언니를 탓했다. 그때는 아빠가 미웠으며 아빠의 행동에 괴로웠다.


그런데 내가 극심한 불안을 겪으며 약 한 달에서 두 달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시기가 있었다. 그 어느 날은 내가 아빠처럼 미쳐가고 있구나, 아빠의 조현이 나에게 유전이 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숨도 자지 못한 적이 있었다. 나는 미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와 같이 자보기도 하고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도 받아먹어 봤지만 잠에 들지 못했다. 심장은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요동쳤고 그로 인해 1분에 한 번씩 잠이 깼다. 아침에 너무 괴로웠지만 나는 출근을 하고 싶었다. 집에만 있는 것이 더 불안했다. 내가 일상을 살 수 있다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걸 나 스스로 입증하고 싶었다. 다음날 출근을 했지만 일에는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폭풍우 치는 파도가 이는 바다가 아닌, 잔잔한 나의 바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의 잔잔한 바다를 찾기 위한 여정에는 나의 의지, 그리고 주변인들의 긍정적인 수용, 타인에게서 느낀 인류애 이 삼박자가 잘 어우러져서 다행히 잔잔하지는 않아도 적당한 파도가 이는 바다로 돌아왔다.


상담사선생님과 과 정신과의사 선생님께서는 우리 아빠가 조현병이 아니며, 내가 그렇게 될 확률은 더더욱 낮다고 했다. 수면유도제와 항우울제를 처방받고 전문가들의 확신의 말을 들으니 잠도 점점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그동안 쌓아왔던 내 우울과 불안, 강박, 안 좋았던 유년시절, 가정사를 친구들과 상담사에게 털어놓으니 마음도 점점 가벼워졌다. 회사에도 내 상황을 말하니 정말 잘 이해를 해주셨다. 불안과 우울이 너무너무 심해 어디에든 털어놨어야 했어서 너무 모든 걸 말했나 싶기는 하다. 정말로 나는 나의 치부까지 다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운이 좋게도 모두가 잘 수용을 해주고 이해해 줘서 다행이라고 항상 생각한다. 또한 그들에게도 너무나 고맙다. 마음이 아플 때는 살짝 베인 상처도 뚫린 것 같은 고통으로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는 타인의 조그만 선의조차도 나에게는 희망과 살아갈 원동력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내가 점점 불안과 우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두려움보다 죄책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아빠의 불안을 이해했을 때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가 미쳐버린 아빠의 불안을 이해한다는 건 나도 미치고 있다는 증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와 언니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한 거는 불안해서 그랬구나 알았을 때,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아프다는 얘기만 한 거는 따뜻한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랬구나, 우리가 자기의 집을 훔친다고 했던 건 이해 못 해주는 우리가 미웠구나 싶었을 때, 불면과 안면마비, 그리고 환각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거였구나 알았을 때, 그리고 결국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 또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부터 나는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아빠의 얘기를 좀 더 잘 들어줬다면, 짜증 내지 않았다면 아빠는 더 나아질 수 있었겠구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얘기를 들어줬는데 아빠는 아무도 자기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 외로웠겠구나. 이제는 아빠의 불안 내가 다 이해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후회와 죄책감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엄마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이 들었다. 내게 어린 시절의 엄마는, 어쩌면 20살 초중반까지의 엄마는 칭찬에 인색하고 혼을 잘 내고 자기의 분에 못 이겨 소리 지르면서 화를 내고,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정말 미친 사람처럼 화를 냈다. 부부싸움을 하면 경찰이 올 때도 있었고 피를 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혼을 한 후에는 그게 우리에게 돌아왔다. 아 물론 경찰이 온다거나, 피를 보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 엄청나게 맞았다. 맞았다기보다는 팼다는 단어가 더 정확할 정도로. 나는 운 좋게도 많이 맞지는 않았다. 언니가 엄청나게 맞았는데 어느 날은 그걸 몇 시간 동안 봤어야 했다. 나는 언니와 같은 방을 썼고 도망 칠 곳이 없었다. 언니가 맞은 이유는 새벽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니는 굴하지 않고 엄마의 통제 밖에서 벗어나 놀다가 새벽에 자주 들어왔고 거실에서 자던 엄마는 들어온 언니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자기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렸다. 나는 잘 수 없었고,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것 같다. ‘-것 같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이 세세히 잘 기억이 안 난다. 분명 맞은 기억도 많고 엄마가 나와 언니에게 저주에 가까운 욕을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꼽을 정도로만 기억이 난다. 분명 약 15년은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다. 상담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해리성 인격장애 수준으로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시켜 어린 시절의 안 좋았던 기억들을 기억 못 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왜 그때 나에게 칭찬대신 비난을 퍼부었는지, 왜 나를 방치하고 학대에 노출시켰는지. 엄마로 인해 생긴 나의 결핍이 나 스스로를 망치고 있는데… 하지만 엄마가 희생을 했다는 걸 알아서,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건 없는 형편에 어떻게든 해줬어서, 그리고 내가 엄마에게 사랑을 받고 있구나 느끼게 해 준 적이 많았어서, 그래서 차라리 지금까지도 때리고 비난했으면…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더라면… 나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엄마를 마음껏 미워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가장 미웠다.


엄마는 내 정신과 방문을 통해 지난 시절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극도의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을 때 내 마음은 지옥이었다. 나는 약 두세 달 겪은 거였지만 고통스러웠는데 엄마의 마음과 인생은 몇십 년 동안 고통이었겠구나 엄마는 이런 인생을 살아왔구나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분명히 말하자면 가정폭력의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엄마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삶도 마음도 지옥이었을 걸 아니, 그리고 지금은 그러지 않으니

엄마가 학대의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죗값을 받았고 형을 치렀으니 겨우 찾은 엄마의 안정과 평화가 깨지지 않길 바란다. 아직도 난 당연히 엄마에 대한 미운 마음이 가끔씩은 나온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또한 이제 내게 가족이란 안전한 울타리 같은 존재이다.


아빠와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을 구원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항우울제도 많이 도움이 되었지만 정말 도움이 되었던 말이 있다.


갑작스러운 종교적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법륜스님의 말씀이었다. 확실히 말하자면 나는 무교이다. 집이 불교였어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나도 어쩌면 불교에 가까운 무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말은 종교를 떠나서 나와 동일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말이다.


어느 딸의 사연이었는데 엄마가 우울증으로 힘들다고 했을 때 자기는 좋게 반응을 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시고 이제 자기가 우울증을 겪는데 그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니 너무 괴롭고 후회된다고 하셨다. 하지만 스님께서는 사연자가 가해자가 아닌데 가해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것도 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못 구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고 하다가 못 건진 것은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밀어서 빠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건지면 복이 되고 못 건지면 그만이다.‘라고 해주신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다. 또, 비슷한 사연에서는 부모의 업보가 자식에게 내려온 거와 비슷하다며 그렇게 살다가는 부모와 비슷하게 살 것이라며 부모는 부모, 나는 나라고 생각하며 그 업보를 끊어내라고 하셨다.


내가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과연 아빠에게 계속 따뜻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빠를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나로 다시 돌아가 엄마에게 항우울제을 먹으라고 추천한다 해도 엄마는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네가 뭘 아냐고 거절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가정을 세워봤자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내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오은영 박사님도, 법륜스님이 하신 말씀이 다 같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똑같았다. 우리가 부모에게서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살아온 환경과, 기질이 달라서 다른 삶을 살 수 있고 부모와 나를 분리시키라는 것이다. 그들은 내게 유전자를 물려줬을 뿐 내 삶의 태도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나에게 소스를 물려준 소스통들은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예민함이라는 소스를 그들에게 물려받았다. 모든 성격과 감정은 양날의 검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나는 예민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후로 안 좋은 감정도 좋은 감정도 깊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나의 성장에 아주 좋은 양분들이다. 열등감은 내가 더 나아지고 싶게 하는 원동력이다. 실패에서 배운 경험과 좌절감은 오히려 나를 한 단계 올라서게 했다. 우울과 불안 덕분에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괴로웠던 그 경험들이 없었다면 나는 나를 완벽하게 잘 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아서 나의 감정들을 회피하고 평생 억누른 채 살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로 나의 부모님처럼 됐을 수도 있겠다. 많은 실패들이 나를 구렁텅이에 빠지게 했지만 나는 열심히 구렁텅이에서 나왔다. 그 경험이 나를 성장시키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지금 빗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는 이 상황 자체도 행복하다.


나는 부모님이 내게 안 좋은 것만 물려줬다는 오만과 연민에 빠졌다. 하지만 역시 소소한 행복에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지는 태도와 긍정적인 파워는 내 부모님께 물려받은 좋은 소스들이다!


부모님에 관한 글을 쓰는 건 너무나도 회피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내가 부모님처럼 미치지 않을까 걱정을 한다. 나의 부모님들에 관해 그리고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직면하는 건 아직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글을 쓰니 후련함이 좀 더 크다. 내게 예민함을 선물해 준 나의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사소한 거에도 행복하고, 사소한 거에도 불행하지만 덕분에 삶은 즐겁다. 또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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