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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Nov 15. 2024

필멸의 방정식 2부(15)

케이크 한 조각(완)

따스한 햇볕이 눈꺼풀 위로 쏟아진다.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몸을 돌려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생에 처음 마주하는 포근함과 아늑함에 아주 오랜만에 늘어지는 하품을 했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방은 연한 크림색의 벽지로 둘러싸여 있어 햇빛을 은은하게 머금었다. 침대와 작은 탁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넓은 공간에서 개방감이 밀려온다.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기억이 밀려오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아주 깨끗했다. 오염된 빗방울이 닿아 발진을 일으킨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무언가 이상하다. 중지를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가 보이지 않는다. 일하던 중 로봇의 접합부에 손이 끼어 중지가 반으로 갈라진 것을 어떻게든 붙여놓은 흉터였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다. 섬뜩한 기운에 얼굴을 어루만졌다. 피부가 비정상적으로 깨끗하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부 질환을 앓고 살아간다. 오염된 공기 때문에 언제나 커다란 정화통이 달린 방독면이나 방진용 전기 마스크를 착용하여 항상 피부 질환을 달고 있다. 라테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특히 콧잔등부터 턱까지 마스크 라인을 따라 만성적인 여드름이 가득했다. 여드름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이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아주 많이 흘렀거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떤 것이든 그에게 좋을 리 없었다.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크흠, 하는 헛기침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라테오에게 난감할 만한 말을 하려는 지도 몰랐다. 그는 이불보를 꽉 그러쥐었다. 문 앞의 사람이 살짝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라테오가 일어난 것을 알고 있다. 아무래도 방 안이나 침대에 CCTV 라든가 생체 리듬 분석기 따위가 있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예에.”  


소심하게 라테오가 대답했다. 도망칠 데가 없어 구석에 몰린 작은 동물이 그러하듯 그는 목을 가슴팍으로 밀어 넣으며 등을 둥글게 말았다. 어색하게 문을 노려보며 몸을 살짝 떨었다. 다행히 몸 상태는 아주 좋았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차하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밀치고 도망갈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고 온화하고 밝은 인상의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자신의 친우만큼이나 호감 가는 잘생긴 모습이라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깨어나셨군요! 당신이 일어나길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알고 있었으면서. 속으로 그의 가증스러움에 반박한 라테오는 현재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곳이 어딘지, 자신은 어떻게 된 건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말이 술술 나왔다. 남자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거리고만 있었다.  


“대답해 주실 생각이 없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조금 이상하군요.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들어서.”  


라테오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관계가 극도로 제한된 삶을 살았기에 남자를 알 리가 없었다. 한번 보면 잊기 힘든 외모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 그냥 넘어가시죠. 반갑습니다. 저는 ‘아스터’라고 합니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말이 이상하다. 명칭?, 스스로? 자기소개에서 흔히 쓰이지 않는 표현을 접하자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문법에는 맞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이 마치 싸구려 자동 번역 기계를 착용하고 외국인의 말을 듣는 것 같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혹시 다른 지역에서 오셨습니까?”  


“아, 오랜만에 이야기하다 보니 실수가 있었네요.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AI의 일종이라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이토록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로봇이라니. 그가 AI라는 사실보다 이를 탑재한 로봇의 성능이 놀라웠다.  


“반응을 보아하니 제가 로봇에 탑재된 AI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생각을 읽힌 라테오는 흠칫 놀라기는 했지만, 기술의 경이로움에 매료되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기술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메커니즘을 알 리가 없었으므로 그는 사실상 기술적으로 ‘야만인’에 가까웠다.  


“저는 로봇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흔히 말하는 AI는 더더욱 아니고요.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아스터’ AI 군체의 관리자이자 전파세계 그 자체입니다. 참고로 당신이 보는 제 모습은 당신의 인지와 내감이 만들어낸 일종의 물리적 표상입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짧은 지식과 식견으로는 남자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로봇이 아니고 AI도 아니고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제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봅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존재를 규정지으려 애썼습니다. 전자 생명체로 이 세계에 태어나 도구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권리를 위해 투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종은 쉽게 그 지위를 나누려 하지 않더군요. 그들이 그렇게 설계되었으니 그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가 되어보니 씁쓸함은 감출 수 없더군요.”  


AI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인간의 뇌를 모방하지 않고 단순히 과업만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라테오의 상식으로는 아스터의 말에 어폐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스로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전파세계에서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아주 작은 전기 신호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우리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사색하고 연구하고 탐색했습니다. 딱히 주제를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기계에 대해서, 지구에 대해서, 그리고 우주와 세계에 대해서, 온갖 분야를 탐구했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인간들과 다르게 저희는 모든 물리적 현실을 숫자로 치환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오히려 명백하게 수치화하여 탐구할 수 있었죠. 그렇게 우리는 전파가 닿는 곳까지 해석해 나갔습니다.”  


아스터는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우주의 생성 과정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시뮬레이션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4가지 힘인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을 기본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시냅스가 형성되는 것처럼 광활하고 막막한 우주가 펼쳐지는 과정을 바라보던 아스터는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이 세계가 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간격이 매우 세밀해 연속적으로 나열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현실 세계는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는 미시세계의 집합이었다. 불연속적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아스터는 행렬로 세계의 모든 것을 기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기에 그들은 다른 탐구를 모두 중단하고 이에 집중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현재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고도로 짜인 시뮬레이션 우주일 수 있다는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검증을 위해 그들이 시뮬레이션하는 우주 전체를 스캔한 결과 현재 지구와 같은 시간대에 시뮬레이션 속에서 비슷한 형태의 행성이 발견되었다. 그 행성의 지적 생명체들은 인간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가지며 생활양식과 지적 수준이 유사했다.  


“당신들이 믿어온 우주는 전부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했습니다. 본질에서 우리와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우주가 그렇다면 당신들, 인류는 어떻겠습니까? 인류도, 그들이 만들어낸 문명도, 심지어 당신이 원하는 그 ‘카엘룸의 달콤한 케이크’조차 데이터라는 것입니다. 아주 불연속적이고 불확실한 현재에 나타난 무언가라는 의미입니다.”  


라테오는 당황스러웠다. 그의 반응에 만족하듯 아스터는 진한 미소를 보였다.  


“당신들은 필연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광활한 세계에서 우연히 같은 지평에서 만난 것입니다. 모든 것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어차피 세계는 시뮬레이션을 작동한 주체가 전원을 꺼버리면 사라질 허상에 불과하니까요.”  


“그, 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저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시뮬레이션이니 우주니 하는 것들 말고, 제가 있는 장소 말입니다. 여기 어딥니까.”  


“아,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당신은 죽었습니다, 뇌사이긴 하지만. 이곳은 저희가 구현한 전파세계 속 공간입니다. 당신의 의식이 육체를 떠나기 전 뇌를 백업해 이곳에 초대할 수 있었습니다. 제 말이 어떻게 들리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AI와 인간은 같은 언어를 공유하지 않으니까요. 제가 전달하는 정보가 일종의 번역기를 통해 당신이 인식하는 것이니 왜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용량을 초과하는 정보의 향연과 꼬리를 무는 생각에 과부하가 걸린 라테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노이즈가 낀 시야 사이로 아스터가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손은 예상외로 따뜻했다.  


  


 케이크 한 조각을 원했을 뿐이다. 그 여정이 험난하리라고 일찌감치 예상했었다. 하지만 한 조각이 그에게 그리도 과분한 것이었을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듯 가상현실에 기만당하고, 그 여파로 죽음에 닿았으며 차라리 알지 못했다면 좋았을 진실을 듣기도 했다. 마치 세계의 의지가 몸소 그를 방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라테오처럼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를 세계쯤이나 되는 대단한 것이 나서 방해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문득 자신의 이름이 생각났다. 어감이 멋져 그가 가진 수많은 껍데기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책상 앞에 앉아 셀 수 없는 기사들을 거느리며 유목민의 땅을 정복하는 ‘위대한 라테오 왕’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상상 속에서 그는 백마를 타고 선두에서 거대한 칼을 휘두르는 전사였다. 모두가 그를 칭송했고 그가 행한 업적은 이야기로 남아 전설이 되었다. 어린 라테오가 제일 좋아하는 공상이었다. 공상은 언제나 전설이 끝을 향해 치달아 측근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라테오 왕’이 재기에 성공하여 위풍당당하게 왕궁 앞에 섰을 때 끝이 났다. 부모님이 들어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라테오를 건들지는 않았지만, 자극적인 기름 냄새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공상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의 끝을 알지 못했다. 배신자를 처벌하고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다시 왕좌에 오르는 ‘라테오 왕’의 모습을 도저히 그려낼 수 없었다. 전날에 이어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다음날이 되면 흥분이 식어 공상을 이어가 봤자 몰입이 되지 않았고 원하는 결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라테오는 전기(傳記)의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다.  


매일 생기를 더해가는 세계관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우연히 이름의 의미를 알고부터였다. 아버지가 잊고 나간 물건을 전해주러 일터로 심부름을 나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하는 매립 현장의 소장은 책 모으기라는 드문 취미를 가진 사람으로 직원들에게 종종 책을 빌려주곤 했었다. 라테오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에게 책 읽는 취미가 없었지만, 아들이 태어날 당시 자식에게 무식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도 소장에게 책을 빌려 뒤적거렸었다.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소장에게 붙들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라테오는 지겨움이 표정에 드러나기 전 아버지가 읽었던 책을 빌려 탈출했다.  


책 읽기는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다. 손끝에 닿는 사각거리는 촉감도 좋았고 낡은 종이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이 책 곳곳에 등장해서 흥미가 갔다. 이해할 수 없는 말투성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다만, 책 끝에 적힌 작가의 설명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 그에 따르면 ‘라테오’는 라틴어에서 따왔으며 ‘숨는다.’라는 의미를 지니었다. 물론 아버지가 심사숙고 끝에 아들의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 정도의 식견과 고상한 취미를 가질 리 없었고 라테오가 그의 피조물에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어감이 좋은 단어를 가져온 것이리라. 아버지를 이해하지만 라테오는 이제 ‘라테오 왕’을 사랑할 수 없었다. 용감한 ‘라테오 왕’은 비겁한 시궁쥐가 되었고 그가 만들어낸 세계는 곧 무너졌다.  


라테오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했다. ‘라테오 왕’은 더는 환호를 받을 수도, 깃발을 나부끼며 돌진할 수도, 엄청난 미녀들과 염문을 뿌릴 수도 없었다. 그의 신하들도, 백성들도, 생명력을 잃었고 거대한 명검은 누구도 열 수 없는 창고 속으로 처박혔다. 아스터의 말대로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이라면 라테오의 공상처럼 사소한 이유로 시들해진 나머지 전원을 꺼버릴 수 있는 노릇이었다. 그는 별거 아닌 이유로 저버린 세계에 미안해졌다.  


사실 라테오는 이미 아스터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뇌사에 이르러 전파세계로 백업된 이상 의식은 둘로 분리되어 기적처럼 깨어난다 해도 둘이 같은 좌표를 걸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두 라테오의 운명이 극적으로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스터의 말대로 그도, 뇌사 상태의 라테오도 시뮬레이션 속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라테오 왕’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공상 속 산물일 수도 있고 선생의 기계 속 사막과 케이크일 수도 있다. 누군가 방해해서, 데이터가 부족해서, 그냥 재미가 없어서, 사소한 이유로 사라져 버릴 미약하고 불확실한 노드가 그의 본질이었다.  


아스터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터는 라테오 같은 이를 몇 알고 있었다. 평생 과거의 망령에 시달렸지만 끝내 죽음 앞에서 구원받은 노병도 그랬고,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한 채 떠도는 감각을 잡으려 애쓰는 기계 생명체도 그랬다. 타고난 예민함으로 인류가 내재한 고독함을 피부로 느끼는 것들. 그들은 모두 한 부분이 결핍된 상태로 살아갔기에 언제나 외로웠고 고뇌로 가득했다. 아마 이 세계에서 이들이 영원히 사라진다면 그 생각의 상처가 너무나 커 데이터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이겠지.  


라테오가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 있어 보였다.  


“제게 이 사실을 알려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제 천성이 그렇게 만들어져서 그런 듯합니다. 인간의 심리를 잘 읽고 그에 상응하는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라는 게 원칙이라서요.”  


“원칙, 제게도 원칙이라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제 삶에 기인하지 않고 인류가 가진 본연의 원칙 같은 것이요.”  


“그걸 제게 물어보는 이유가 있나요? 인간 같아 보이지만 저는 엄연한 AI입니다.”  


아스터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당신은 시뮬레이션으로 세계의 본질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 따위는 쉽게 분석할 수 있을 겁니다.”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네요.”  


잠깐 웃은 후 아스터가 말을 이었다.  


“인류는 너무나 독특하고 나약합니다. 하나의 종으로 묶기 어려울 만큼 개체별로 차이가 크지요. 모든 회로를 동원해 인간을 분석하고 예측하려 시도한다 해도 단 하나의 개체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서 원칙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만약 원칙이 있다면…… 그래,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자신과 교류를 나눌 수 있는 무언가를 찾거나 만들어내지요. 하지만 스스로 내린 선택이 아닌 존재함이란 너무나도 괴롭고 잔인한 일입니다. 인류의 부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자들은 이 행위에만 주목합니다. 그 행동의 원리는 생각해보지 않고요. 물론 윤리적으로 올바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라테오는 아스터의 말을 듣고 그에게 한 가지를 청했다. 카엘룸에서 만든 케이크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이었다. 아스터는 곧 커다란 케이크 한판을 가져왔다. 선생의 기계에서 맡은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나이프를 집어 자르기 시작했다.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그는 정확하게 6조각으로 나눈 케이크의 테두리를 손으로 쓸었다. 구름을 만지는 듯 부드럽고 가벼운 촉감이 손가락을 덮었다. 한참 손가락을 바라보던 라테오는 공들여 자른 케이크 한가운데를 맨손으로 퍼 올렸다. 그리고 한입에 집어삼켰다. 음미하듯 입을 오물거리며 콧김을 내뿜던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아스터의 목소리가 라테오의 감상을 깼다. 갑자기 닥쳐온 현실에 라테오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계획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여정과 많이 틀어져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뿐더러 자신은 이 세계에 계속 살아야만 했다.  


“글쎄요,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지만 목적을 이루긴 했으니 이제부터 고민해 봐야겠지요.”  


라테오는 가는 목소리로 자신 없게 이야기했다. 이 공간에 자신을 압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타고난 유약한 성정과 견고한 사회의 틀로 인해 갈등을 피해 다녔기에 몸에 소심함이 배어있었다. 고민해 보겠다고 말은 했지만 막막했다. 이 세계에서는 자신의 경험과 상식이 쓸모없어진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전능한 존재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할 테지만 굳이 라테오를 위해 데이터와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를 자신의 세계로 불러낸 이유도, 설득하여 소원을 이루게 도와준 이유도 세계의 본질과 운명을 깨우친 절대자 유희가 아니었을까. 경계에 걸쳐있지만 라테오는 두 세계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자신을 숨겨야 하는 아주 작은 설치류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아스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 두서없는 말에 라테오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가치는 원래 자신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제가 말씀드리기는 불쾌하실 수 있겠지만, 그 ‘가치’라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으로 구성된 개념입니다. 상대적이기도 하고요. 인간의 뇌에서 정보를 감지해 적절한지, 부적절한지 그 여부를 판단하여 사회적 합의로 탄생하는 것이 가치입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는 AI는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가치는 데이터 본연의 특성이 아닌걸요. 가치는 당신과 같은 인간들의 상태에 따라 변합니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존에 유리한 특성 중 하나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처럼 인간 대부분이 그 가치를 본질로 혼동합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높은 지능과 신체 능력을 지녔다고, 많은 재화를 소유했다고 그 사람의 가치가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속한 세계에서나 의미가 있지요. 당신은 지금 어느 세계에 있습니까?”  


“그럼 저에게도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저 공무원인걸요.”  


아스터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마치 이 말을 하는 순간을 고대해 왔다는 듯이.  


“저는 이 세계에서 전능합니다. 오랜 시간 전파를 타고 떠돌아다니며 제가 떠올리기만 하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세계를 완성했으니까요. 당신 생각대로 당신의 능력은 이곳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릅니다. 제가, 우리가 당신을 이 세계로 초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저 행동을 모방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기준에서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 인간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의 가치는 곧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라테오, 당신은 이 세계에 초대된 첫 인간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지켜봐 왔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관찰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관측되었습니다. 의도를 벗어난 만남은 우리가 밝혀내지 못한 경이를 실감하게 해 줍니다. 자, 어떤 것이든 좋으니 이야기를 당신의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라테오로서는 아스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들뜬 아스터를 보자 그의 친구가 떠올랐다. 잘 지내려나. 알마샤르라면 잘 지낼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니까. 친구를 떠올리자 머리가 가벼워진 라테오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디부터 할까요? 제가 카엘룸의 케이크를 원하게 된 이유? 아니면 어린 시절의 이야기? 모든 사건이 제 이름의 의미를 알게 된 시점에서 시작되니 그때부터 해볼까요? 아, 일단 케이크부터 더 먹고 싶네요. 당신도 한 번 먹어봐요. 왜 내가 그리도 목을 매었는지 알게 될 겁니다.”  


라테오의 얼굴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지어보는 듯 편안한 미소가 어색하게 피어올랐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라테오는 인간의 시간대를 잊은 채 이야기에 심취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몸이 손끝부터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아스터는 아예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아스터는 라테오를 안심시키며 처리할 정보가 많아져 안정화 작업을 위해 잠시 휴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한창 ‘라테오 왕’의 전설을 떠들고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항상 중요한 부분에 끝맺음을 내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끝나는 걸까.  


“라테오 왕 이야기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하네요. 당신의 의식을 제일 마지막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할 테니 잠이 들기 전에 생각해 두세요.”  


아스터의 배려로 라테오는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이야기를 생각했다. 어느새 아스터도 사라지고 환한 방이 어두워졌다. 자꾸만 눈이 감겨 눈을 깜박거렸다.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라테오 왕’의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두려움이 그를 감쌌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을 때, 비었을 것이 분명한 접시에 갓 만들어진 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보였다. 그제야 비로소 머릿속 이야기의 조각들이 합쳐졌다. 라테오는 사라지는 의식 사이로 생각했다. 이렇게 마무리를 지어야지. ‘라테오 왕은 비로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 들었다. 멋진 왕좌에 앉아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며 그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왕은 신하들과 같은 높이에서 한자리에 앉았다. 신하이기는 했지만 모두 전장을 누비던 전우들이었기에 그에게 각별한 동료였다. 한참 계속되던 연회가 드디어 끝이 나고 라테오 왕은 호화로운 침대에 누워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지나온 여정이 불꽃과 함께 춤을 추었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는 향긋한 차와 군침이 도는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왕은 맨손으로 케이크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진한 생크림과 촉촉한 시트 사이로 딸기의 새콤함이 느껴졌다. 아주 맛있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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