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샤르의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측이 의미 없을 정도로 잦은 빈도로 오염된 비가 하늘에서 내리게 된 이후 교통 대부분은 지하에서 이루어졌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국가처럼 운영되는 지금, 도시 사이의 교역을 제외하고는 외부로 나갈 일이 없고 개인 운송 수단을 이용하기에 유지비, 차도의 부족 등 애로사항이 많아 아랫마을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대세였다. 더구나 세계대전 이전 도심의 지하를 난잡하게 가로지르는 지하 철로를 개량하여 만들어진 터널 ‘리치’를 통해 도시 곳곳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시민들은 굳이 개인 운송 수단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다만 도시가 완공된 이후 대규모의 이주민, 난민이 쏟아져 들어와 만들어진 제30 구역은 도저히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 건축이 이루어진 곳이라 들어가려면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와 역 앞에 있는 지하상가를 통해 다시 들어가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다. 계획 이후에 개별적으로 지어진 곳인 만큼 이전 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만약 때를 놓쳐 비가 내린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곳에 알마샤르의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처음부터 30 구역이 슬럼화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반구 형태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외곽 군사시설이 위치한 곳으로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타 도시와 교역 시 관문 역할을 도맡아 하던 나름 번성한 곳이었다. 문제는 이 군사시설이 온전히 도시의 소유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지구가 나름 생태계를 유지하던 시절, Cade 사는 한 국가로부터 도시의 소유권 하나를 온전히 넘겨받았다. 하지만 ‘산업 육성 지원’이라는 명목상의 이전이었던 만큼 국가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을 설치하고 시설에서 자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도시를 시작으로 Cade 사의 시장 장악력이 높아지자 여러 국가가 앞다투어 Cade 사에 도시의 소유권을 넘겼다. 그러던 중 라테오가 거주하는 도시의 국가가 내란을 겪으며 쿠데타 정부가 들어서는 사태가 벌어진다. 경제 위기와 민심 회복을 위해 극단적인 양적 완화를 시행한 쿠데타 정부는 결국 초인플레이션을 맞이한 채 주변국들에 오체분시 되고 말았다. 중립을 표방하며 분쟁에 개입하기를 지양한 Cade 사는 내란 이후 이전 정부와의 계약을 들먹이며 도시에 대한 실질적인 소유권을 주장한다. Cade 사 같은 거대 기업에 맞설 힘이 부족했던 주변국은 계약상 명시된 국가 시설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세계 연합에 분쟁 조정을 위탁하였고 이는 기나긴 소송으로 이어졌다.
소송이 장기화하며 국가 시설 인근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의 거취가 불분명해졌다. 국가와 Cade 사 모두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애썼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와중에 곳곳에서 난민, 범죄자 등이 정부의 눈길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왔다. 작은 면적에 사람들이 몰리자 낮은 건물들은 위아래로 아이들이 블록 쌓기 놀이하듯 불법 증축되어 기괴하고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불어났다. 전기 신호를 납치하여 사용하기 위해 전선이 마구잡이로 널렸고 그 위로 오염된 비를 막기 위한 싸구려 비닐 차폐막이 덮여 낮에도 불을 켜놔야 할 지경이다.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장이지만, 이 도시 속의 도시는 점차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기 시작했다. 제30 구역의 모든 사람들이 매음, 마약, 청부 살인, 폭력 조직 등 불법적인 일에만 종사하지는 않았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내란으로 자격 증명이 어려워진 의사와 기술자들이 들어와 터를 잡아 장사를 시작했다. 비록 밀수이기는 했지만,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물건을 취급하는 만물상이 있다는 소식에 타 구역에서 30 구역으로 장을 보러 오기도 했다. 이 구역의 경제 규모를 무시할 수 없게 된 도시의 행정가들은 결국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자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알마샤르의 조부모는 난민으로 제30 구역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잦은 내란과 정치적 탄압, 극심한 사막화로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랜 방랑 생활 끝에 도착한 이 난잡한 구역에서 이상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발견했고, 작은 학교를 차려 낮에는 아이들, 저녁에는 만학도를 대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했다. 수십 년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학교는 제30 구역에서 가장 크고 체계가 잡힌 사학 재단으로 거듭났고 이제는 타 구역까지 진출해 자신의 교육적 이상을 전파하고 있다. 카엘룸에 올라가고도 남을 재력과 영향력을 지녔지만 가장 밑바닥에서 교육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알마샤르의 조부모는 스스로 기득권이 되기를 거부했다.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알마샤르의 조부는 자신의 재단을 신뢰하는 제자에게 맡기고 작은 집에 살며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역 앞 지하상가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오면 보이는 두 번째 건물의 10층, 어두침침한 복도를 지나다 보면 유독 화려하고 기하학적 무늬로 가득 찬 태피스트리가 걸린 집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가 그가 사는 곳이다. AI와 로봇이 거짓을 양산하는 시대에 보기 드문 진짜 미술품이다. 섬세하게 수 놓인 자수는 라테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감탄하며 계속 이를 살펴보고 있을 때 누군가 잔뜩 쉬었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름답지 않나요?”
라테오는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꼿꼿한 허리와 큰 키, 마른 대추처럼 검붉은 피부를 가진 노인이 그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듯 웃음이 잘 어울리는 주름이 눈가부터 입가까지 멋들어지게 패어 있었다.
“이 태피스트리는 안사람이 만든 겁니다. 안사람은 취미로 무엇이든지 만드는 것을 좋아했지요. 손재주가 좋아 소일거리로 만들어 주변에 선물하고는 했습니다. 안사람의 작품은 많은 사람에게 안목과 경험을 초월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확실히 라테오의 짧은 식견에도 태피스트리는 대단해 보였다. 무엇이 대단한지 설명하라면 할 수 없겠지만 눈을 떼기 힘든 면이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찾을 사람이 있어서 돌아다니다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알마샤르의 조부님을 찾고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교사를 하셨고, 혼자 산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은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아, 손주 녀석이 말한 분이 당신인가 봅니다. 연락은 받았습니다. 그 녀석도 참, 직접 데리고 올 것이지. 찾아오는데 어렵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자세하게 알려줘서 찾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저는 라테오라고 합니다.”
라테오는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업무상 허례허식으로 예의를 차린 적은 많지만, 마음이 동해서 성의를 보였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노인에게는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어 허투루 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항상 제 손주 녀석을 돌봐주어 감사합니다. 저는 알마지 스터입니다.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부르셔도 됩니다만, 초면에 너무 격식이 없으면 오히려 더 불편한 법이지요. 내키신다면 선생으로 불러주시지요. 한평생 사람을 가르치다 보니 그 호칭이 가장 귀에 익어서 말입니다.”
선생은 이내 라테오를 집으로 들였다. 향긋하면서 몽환적인 향이 집에 맴돌았다. 살짝 건조하지만 따뜻하여 쾌적하고 온화한 기분이었다. 어느 대단한 신전의 내실에 들어온 듯 비밀스럽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초라하고 냄새가 날 것 같은 자신의 차림새가 부끄러워졌다. 선생은 이내 차를 한 잔 내왔다. 처음 맡아보는 향이지만 진짜 차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의도적으로 후각 중추를 자극하지 않아 아릿한 감각 없이 몸 안 깊숙이 퍼지는 따스한 향기, 좋은 예감이 든다. 친우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향이 좋지요?”
라테오의 만족한 표정을 보고 선생이 말을 걸었다.
“다른 도시에 있는 형제가 보내주는 찻잎을 제 방식대로 가공한 겁니다. 제가 부리는 유일한 사치라고 할까요. 수십 년도 더 전에 이 도시에 오고서 가장 놀랐던 것은 사회의 모든 부분이 감각을 자극하는 기술의 산물로 대체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물며 음식이나 차, 커피도 약물과 뇌에 부착된 칩으로 감각을 속이고 있었지요. 제게는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농락해서는 안 되니까요.”
동감이다. 마침 그도 차 한 잔의 여유와 사치도 허락하지 않는 이 세상에 질려 진짜를 찾아 떠난 길이지 않은가.
“선생님, 알마샤르에게 들으셨겠지만 제게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아니, 고민이라기보다는 목적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저는 온전한 제힘으로 카엘룸의 케이크를 얻고 싶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보잘것없는 사람인지라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가르침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선생은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했다. 한참 구도자의 모습으로 고민하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불가능합니다. 100 퍼센트는 아니지만, 그에 가깝지요. 아주 험난한 길이 될 겁니다. 카엘룸은 쉽게 문을 열어주는 곳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하려고 하는 겁니까?”
이미 예상했지만, 입맛이 쓰다. 선생이 방법이 없다고 하면 정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라테오는 포기할 수 없었다. 케이크에 대한 그의 갈망은 맹목적이었다.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왔거든요. 비록 마지막에 얻을 수 없다 해도 괜찮습니다. 일단은 그 여정까지 목표한 일부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라테오의 대답을 듣고 말없이 작은 상자를 하나 내왔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짙은 먹색의 상자는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동시에 사람을 유혹하는 듯 신비로운 몰입감을 준다.
“이건?”
“오래전, 제가 아직 고향을 떠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선생은 어느새 미소를 거둔 채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과거의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고 악몽은 부풀려져 자신을 평생 괴롭힌다. 선생은 스스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의 순간은 그의 기억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라테오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퇴근 후 알마샤르와 술 한잔 기울이며 들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는 자신의 조부가 최근 유독 과거의 환상에 미련을 보인다고 하소연했다. 노인이 지나간 아름다운 젊음을 추억하는 것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해심이 넓은 알마샤르의 기준에서도 선생의 집착은 광적인 면모가 있다고 했다. 조부에 대한 신뢰가 깊고 사랑이 크지만, 특히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는 알아서 걸려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의 고향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기로는 말이다. 낮이면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밤이면 은색의 강으로 변하는 곳, 자연의 경이로움과 장엄함이 온몸으로 다가오는 멋진 장소였다. 선생에게 사막은 놀이터이자 학교였다. 구덩이를 파고 비닐을 감싸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마법을 배우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체내의 수분을 재활용해 수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슈트를 물려받기도 했다. 슈트를 입고 마을의 어른들을 따라 사냥을 나가면 사막이 자신을 품어주는 듯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모래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미끄러지듯 걷는 독특한 걸음걸이를 배웠으며 사냥을 통해 생명의 경이와 그에 대한 존중을 알게 되었다. 청년이 되기 전 사막의 생활을 모두 몸에 익혔을 때 선생은 이미 사막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한밤중에 몰래 나가 사구에 몸을 묻고 달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아무리 사막을 좋아한다지만 달궈진 모래와 내리쬐는 태양 빛은 그로서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사막의 밤은 시원해서 좋았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모래 밑 사각거리는 전갈의 소리가 귀를 간질였고 바람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를 피하는 별이 너그러웠다. 그날도 선생은 밤의 사막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적막은 오래가지 않았다. 멀리서부터 땅이 울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몸의 균형을 잡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불안감이 엄습하여 등골이 오싹했다. 순간 마을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으며 열기가 거센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낮보다 뜨거운 열기에 바람도, 물도, 작은 생명도 달아났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달아나지 못했다. 단지 나직한 비명과 억눌린 신음이 공중을 맴돌 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의 마을은 정부와 Cade 사의 기술 제휴에 대한 협약에 대한 반발로 도시에서 쫓겨난 일행이 세운 작은 공동체였다. 그들은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는 폭도이자 Cade 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실험실을 탈출한 쥐새끼였다. 사막에 적응하기 급급했던 마을 사람들은 이미 투쟁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정부는 그들의 입이 무서웠을 것이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고 가족 공동체 문화가 발달한 문화적 특징이 있어,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자신의 입지가 불투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사막에 출입 제한 명령을 내리고 도시 간의 교류를 최소화하려 했다. 하지만 모래의 속삭임마저 막을 수는 없었는지 내란이 벌어지고 만다. 각자 신을 울부짖으며 벌어진 처참한 성전의 여파는 결국 시발점인 선생의 마을까지 덮친 것이다.
이상하게도 선생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음에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생존이 어려워졌기에 아쉬울 뿐이었다. 처음에는 자책도 하고 죄책감에 휩싸이려 노력했다. 분명 소중한 사람들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억지로 쥐어짠 감정의 불순물만이 남아있을 뿐 그들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선생은 모랫길을 따라 이리저리 떠돌다 몰래 도시에 들어간 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다. 아직 내란이 한창이었기에 사막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타오르는 분노와 진한 슬픔을 느꼈다. 그 감정의 방향은 너무나 순수하고 올곧게 사막과 자신을 연결하고 있었다. 그는 사막을 벗어나서 살 수 없었다.
선생은 명확한 목표가 생기자 이를 이루기 위해 달려들었다. 사막에서는 머뭇거리면 죽는 법이기에 약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우선 닥치는 대로 일은 했다. 낮에는 육체노동을 했고 밤에는 수리공을 도와 고장이 난 로봇과 설비를 수리했다. 다행히 거친 사막에서 살아남은 그의 육체는 강인했고 슈트를 정비하며 얻은 지식 덕분에 조수로서도 쓸만했다. 어느 정도 모인 자금으로 그는 학교에 등록했다. 사막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도시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인 교역관 시험에 통과하거나 Cade 사에 연구원으로 취직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추천되어 학비 걱정 없이 매진할 수 있게 된 후 그의 계획은 순풍을 탄 듯 진행되었다. 시간이 흘러 사막의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연구원이 되었고 사막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중 같은 팀 동료인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Cade 사를 위해 일을 하면서 Cade를 격렬하게 증오했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녀는 터전과 문화를 짓밟은 Cade 사와 정부를 혐오했다. 동시에 그에 순응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경멸했다. 그 순수한 분노가 사막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닮아 그녀가 마음에 담겼다. 그녀 또한 선생의 편견 없는 순수한 애정이 신경 쓰였다. 운명처럼 만난 그들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아이가 찾아오고 책임질 가정이 생기자 그들은 예전처럼 순수하게 있을 수 없었다. 무거운 책임감이 그들을 짓눌렀고 자신의 목표와 신념을 생각하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때 그들은 결심했다. 사막을 버리고 떠나기로. 이른 새벽, 모래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전에 그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다. 모래 한 줌이라도 발견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사막을 잊고 정착하기로 했다. 그렇게 발 닿는 대로 떠돌다 흘러들어온 것이 지금의 도시인 것이다.
바쁘게 살았지만, 선생의 사막에 대한 열망은 그리 쉽게 잊힐 수 없는 것이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 주머니에 담아 온 모래 한 줌을 꺼내 밤마다 향기를 맡았다. 아내는 집을 온통 태피스트리와 향초, 시샤와 같은 물담배로 채웠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과 종교 경전 따위를 베갯머리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럴수록 사막은 끈덕지게 선생을 옭아맸다.
구름에 가려 달이 보이지 않는 밤, 그날도 선생은 모래를 한 올씩 세며 정체 모를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내는 그를 바라보며 침대 밑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당신, 아직도 사막이 그리워요?”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흩날리는 모래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생히 들려오는 듯했다. 사구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던 수다쟁이 별이 그리웠다. 발밑을 사각거리며 조심스레 지나가는 수줍은 전갈도 보고 싶었다.
“이거 받아요.”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상자에는 처음 보는 물건이 담겨있었다.
“이건 뭔가요?”
“오늘 제자 하나가 찾아와서 주었어요. 그 왜, 암시장에서 일하는 녀석 있잖아요. 그 녀석이 Cade에 공급책을 하나 알게 되었나 봐요. 시제품이라는데 자세한 건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사용해 보면 그리운 것을 볼 수 있을 거라는데, 속는 셈 치고 한 번.”
헬멧에 고글이 달린 그것은 머리의 전체를 덮는 형태였다. 이를 건네준 아내는 무기력한 몸짓으로 침대로 돌아갔다. 선생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심한 듯 머리에 헬멧을 장착했다. 어둠 속 한 점에서 빛이 발하더니 급작스럽게 그를 덮쳤다. 낡은 형광등이 켜지듯 시야가 점멸하며 돌아온다. 선생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사막 한가운데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모래를 퍼 올렸다. 손에서 바스러지며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자신이 기억하던 사막의 촉감이 맞았다. 문득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건조하고 아릿한 모래의 냄새를 몰고 왔다. 선생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은 마르지 않고 계속 선생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생이 눈물을 보인 이유는 단지 꿈에서나 그리던 풍경을 마주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오랜 시간을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것을 한순간에 얻게 된 허탈감, 적선이라도 하듯 던져진 향수(鄕愁)에 취한 자신에 대한 경멸, 그 광활하고 아름다운 사막을 이따위 기계에 담은 분노 등의 감정이 휘몰아쳐 눈물로 화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이 사막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우세했던 까닭일까, 선생은 헬멧을 벗어던질 수 없었다. 한동안 그는 두문불출하고 헬멧에 파묻혔다. 제자들이 그를 그리워했지만, 아내와 그를 돕는 자식들은 선생이 중요한 연구를 하는 중이라 당분간 수업에 나올 수 없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당시 저는 미쳐있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이 헬멧을 보니 손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선생은 이야기하는 새 늙기라도 한 듯 기력이 없어 보였다. 뜸을 들이며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그는 시샤를 한 모금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내는 저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 적에는 제가 가진 순수한 열망과 그녀의 적의가 같은 목표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 둘은 너무나 닮은 듯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열망에 비해 그녀의 분노는 너무 선명하고 강렬했습니다. 화력이 강한 불은 금세 주위를 태우고 자신도 집어삼키기 마련입니다. 아내는 제가 모르는 사이 너무나 늙고 지쳐있었습니다. 반면 저는 그녀를, 가정을 돌보지 않고 제 꿈에 다시금 파묻혔지요.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제 꿈을 우선해 왔습니다. 아내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빛무리가 걷혔을 때 비로소 저는 아내가 자신의 분노를 내면으로 삼키고 저를 비추기 위해 스스로 발광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늦었지만, 그때가 되어서야 저는 제 돈키호테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선생은 라테오에게 헬멧을 넘겼다.
"이걸 왜 저에게."
"이 기계는 광유전학과 가상현실 기술의 정수를 담은 것입니다. 완벽에 가까운 가상 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구현 장치이지요."
21세기 중엽, 뇌신경학자들은 기억을 완전히 시각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냈다. 외부 자극에 대해 특정 영역의 뉴런은 흥분하며 서로 수용하려 한다. 이때 가장 활성도가 높은 뉴런이 '기억 엔그램', 즉 '기억 흔적'의 일부가 된다. 광유전학을 통해 인위적으로 '기억 엔그램' 세포를 활성화할 수 있게 된 학자들은 이 기술을 '외부세계'를 인간의 뇌에 주입하여 구현할 수 있도록 확장했다. 이러한 메커니즘에 기억 중추를 활용하면 개인형 가상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키워드로 인식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선 헬멧은 신경 자극을 감지해 감정의 강도를 계산하고 뇌에 자극을 주어 기억 중추를 탐색한다. 그중 가장 강하게 흥분한 세포를 찾아낸 후 외부세계, 다시 말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이미지를 뇌에 주사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착용자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강렬한 그리움의 감정을 가상 세계에서 시각화된 실체를 만나게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상이고 기억에 근거한 추상체이지만, 데이터베이스의 정보량과 구현 기술의 보조로 인해 현실을 잊을 만큼 실감이 나는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체험의 몰입감이 너무 강렬해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는 이 헬멧을 착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니, 아예 없애버리자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혹시나 내가 정말 버티기 어려울 때, 그때 사막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이기적인 미련 때문인 거죠. 마치 금연을 하기로 한 사람이 마지막 한 개비를 서랍 속에 모셔두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이 기계로 케이크를 맛보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계획을 작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당신은 저와 다르게 깊이 빠져들지는 않겠지요. 저에게는 매달릴 과거가 있지만,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라테오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분명, 자신은 모든 것을 두고 왔기에 미련을 남길 무언가가 없었다. 자유인으로서 앞으로 목표를 정하기에 아주 긍정적인 상태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텅 빈 껍데기라는 의미 아닌가.
"우선은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일단 착용해 보세요. 제 이야기가 꺼림칙하겠지만 기계는 중립적입니다.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변화한 것뿐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라테오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생각은 다시 생각을 몰고 와 선택과 행동을 늦출 뿐이었다. 어차피 다른 방안이 없다. 설사 있을지라도 라테오의 능력 밖이거나 떠올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라테오는 선생의 시샤를 낚아채 한 모금 크게 마시고 헬멧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한 줄기 빛이 날아와 눈부터 뒤통수까지 관통했다. 개미에 물린 듯 따끔한 느낌에 몸을 움찔했지만, 곧 통증이 가셨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조심스레 손을 뻗자 산뜻한 과일 향이 온몸으로 스며들고 신선하고 점도 높은 크림이 손 끝에 닿았다. 경험해 본 적 없는 포근함과 짜릿함에 귀밑부터 턱까지 뻐근해졌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크림 묻은 손가락이 불쑥 입으로 들어왔다. 진한 우유 향이 정신을 어지럽히지만 수줍게 침범한 딸기의 잔향이 이를 금세 환기해 준다. 눈을 뜨고 싶었다. 당장 달려들어 손으로 집어 들고 목구멍에 처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진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라테오는 지독한 가위눌림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허우적대며 강제로 헬멧을 벗어던지고 숨을 헐떡거렸다. 선생은 이해한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사람을 꿰뚫는 눈빛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되어 양팔로 몸을 감쌌다.
"잔인하지요, 그거."
아직도 코끝에 갓 구운 빵의 달콤한 향기와 새콤한 과일 향이 맴도는 것 같았다. 눈앞에 케이크가 아른거린다.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라테오는 비틀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세상은 무엇이든 간에 쉽게 내주는 법이 없다. 라테오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에 카엘룸이 비쳐 동화 속 마왕이 사는 성처럼 보였다. 비록 진짜가 아닐지라도 그토록 원하던 케이크를 눈앞에 두고도 눈을 뜨지 못하는 자신의 소심한 천성이 비참했다.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목전에 두고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 누군가 눈에 걸린 실을 아래로 당기는 것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그랬다. 어쩌면 본심은 케이크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면 목표로 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기계 따위가 뇌를 헤집어 자신을 기만하려 했다는 불쾌감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오염된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건물 안으로 도망친다. 라테오는 못이 박힌 듯 도로 한가운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 눈에 들어갔지만, 그는 다른 세계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지만 라테오의 귀에는 한여름 밤 모기가 귓전에서 앵앵대는 소리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피부에 붉은 반점이 올라오고 눈가와 손끝에 물집이 잡힌다. 머리카락이 빠지며 어깨 위로 검은 터럭들이 내렸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세계가 멀게 느껴진다. 라테오는 도로 위에 풀썩 쓰러졌다. 멀리서 누군가 긴급하게 달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