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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Oct 17. 2024

필멸의 방정식 2부(13)

케이크 한 조각

오랜만에 출근이지만 라테오는 바로 사무실로 향하지 않았다. 민원 처리 미숙, 약물 과다 사용, 무단결근 등으로 상부로부터 상담을 받으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지배할 것만 같았던 어떤 것이, 그 힘을 잃고 아주 하찮아지는 순간이.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러한 순간이 찾아오면, 지키려는 열망이 사라지고 투신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마치 시험을 한번 잘 못 봤다고 세상이 끝날 듯 울어버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어른이 되어 못나고 부족한 시절에서 풍겨오는 후회로 치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내 상담실 앞에 선 라테오는 불현듯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과거 이 장소에 오면 얼마나 심장이 떨렸던지, 별일이 없었을 때도 굳이 상담실을 피해 멀리 돌아가고는 했었다. 상담실에서는 AI 상담사가 상반신만 있는 로봇의 껍데기에 둘러싸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친다. 초기 단계에는 개인의 신상정보뿐 아니라 살아온 환경, 최근에 하는 생각, 관심 분야 등 알리고 싶지 않은 내면의 깊은 곳까지 수치로 측정되어 상부에 보고된다. 그 이후 지루하고 알맹이 없는 대화를 통해 내담자의 진을 빼놓는다. 어디를 바라보는지도 모르겠는 그 로봇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괴한 두려움과 동시에 본인의 존재가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라테오를 비롯한 사무실 모두가 상담받는 것을 꺼렸고, 상담을 받으라는 지시는 징계의 순화된 표현으로 이해했다.  


어째서인지 라테오는 이 상황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며칠 전의 사건으로 징계성 지시가 하달되자, 자신이 그리도 매진했던 이 사회는 그를 보호해 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괜히 매달릴 바에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하는 심정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자포자기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모두가 맹신하는 체제와 가치를 포기하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갈구하기 위한 이 대체과정에, 비록 케이크처럼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랑스러움을 넘어 우월감까지 들었다.  


문을 열자 새하얀 배경에 그보다 더 환한 조명이 부딪혀 환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초점 없는 로봇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다. 과거에 그리도 불쾌하게 느껴졌던 그 눈빛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열한 동정심과 쾌감이 내면에서 머리를 들었다. 답답한 현실에 있지만 그래도 자신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은가. 저 낡아빠진 기계는 잘난 듯 떠들지만 결국 저 자리에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 물론 AI나 로봇에게 ‘평생’이라는 개념이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라테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화면을 경쾌하게 두들겼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공무원 식별 코드를 순서대로 입력하자 로봇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져 나오며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라테오 님. 상담 전문 AI ‘콘슬-3’입니다. 상담 중 대화는 차후 양질의 상담을 위해 녹음되어 분석하며 외부로 유출되지 않습니다. 이번 상담 이후 이루어지는 상담에 대해서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라테오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기에 상담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케이크를 먹기로 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절친한 동료가 격렬하게 만류했지만, 이미 라테오는 결심을 내린 상태였다. 알마샤르는 최선을 다했다. 카엘룸의 케이크를 구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신분으로 카엘룸에 방문하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라며 설득하기도 했고, 심지어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구해다 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착한 친구. 하지만 라테오는 혼자만의 힘으로 해보고 싶었다.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없지만, 단순히 케이크를 먹는 것이 여정의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 과정 전체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알마샤르는 한숨을 쉬며 퇴직 처리를 도와주겠다 했다. 사실 퇴직을 한다면 상담을 받을 필요가 없지만, 그로서는 온전히 벗어났다는 확신이 필요했기에 자처하여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역시나, 전부라고 생각했던 이곳은 이제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팔짱을 끼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상담사의 설명을 들은 라테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테오 님? 어딘가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만약 이 자리를 떠난다면 지시 불이행으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시 불이행, 불이익, 이 얼마나 두려운 단어들이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에게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라테오는 상담실을 나섰다. 로봇의 경고가 시끄럽게 울려댔지만, 그는 오히려 통쾌한 기분이 들어 발걸음이 가벼웠다.  


“정말 가는 거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마음 바꿀 생각은 없지?”  


1층 로비에 알마샤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답지 않게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미루어보아 계속 걱정한 모양이다. 그의 마음이 고마워, 못내 아쉬운 감정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떨쳐냈다. 배웅이 짧을수록 나아갈 길이 뚜렷해지는 법이니까.   


“고맙네, 여기까지 나와주고. 사무실은 어때? 갑자기 한 명 없어져서 혼잡해지려나?”  


“팀장이 짜증 내기는 하지. 가뜩이나 사람 없는데 빠지면 어떡하냐고. 이기적인 자식이라고 욕하고 다녀.”  


“그 사람 곤란해하는 거 못 본건 아쉽네. 그 반 대머리 한 방 먹이고 싶었는데.”  


알마샤르가 피식 웃었다. 사람 좋은 그는 팀장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이 오후 일과일 정도로 자주 불려 다녔다. 그의 미소를 보니 조금은 도움이 된 듯해 뿌듯했다. 먼저 탈출하는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나 보다.  


“이제 어떡하려고. 생각한 계획이라도 있어?”  


라테오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마음이 떠나 결심한 것으로 후회하지는 않지만 반쯤 충동으로 저지른 일이라 막막하기는 했기 때문이다. 그럴 줄 알았다며 알마샤르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쪽지에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이건?”  


“우리 할아버지 집.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하다 보면 방향이라도 잡을 수 있겠지 싶어서. 원래 답답할 때는 어른들에게 물어보라 하잖아. 네 선택이니까 가고 싶지 않으면 가지 마.”  


라테오는 물끄러미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동료는 몸을 돌려 사무실로 향했다. 그 또한 곧 건물 밖으로 나갔다. 어두침침한 도시에 그럴 리 없지만 밝은 햇살이 비추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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