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어린 시절 꿈을 꾸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그들은 라테오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집에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을 나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녹초가 된 채 비틀거리며 침대로 향할 뿐이었다. 전기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마구잡이로 건립한 전기 설비를 지하로 메우는 일을 하였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전기 설비가 도시 미관을 해치기도 하고 통제 로봇이 최대의 효율을 보이기 위해서는 매립식 설비가 필요했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엉겨 붙은 머리를 마구잡이로 긁으며 옷을 대충 벗은 후, 발로 밀어둔 채 몸을 던지듯 잠자리에 든 그의 얼굴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어머니도 사정은 비슷했다. 아버지보다 항상 먼저 일어나 물류창고로 향한 그녀는 정오 즈음까지 분류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동 시간도 아까웠던 어머니는 두 번째 직장인 사설 건물 청소 업체로 향하는 버스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때웠다. 당시에는 유독성 빗물이 건물 안까지 들어오는 일이 많아 건물 청소를 수시로 해주어야 했다. 오염물에 대한 위험도와 처리 방법이 정립된 시기가 아니었기에 청소 노동자들은 노출된 신체 부위를 겨우 가리는 정도의 방호복만 입고 현장에 투입되었다. 어느 시대건 간에 위험한 일에 대한 수요는 많지만, 공급이 없어 어머니처럼 사정이 급한 사람이 일용직으로나 하던 일이었다. 저녁부터 새벽까지는 싸구려 술집에서 설거지하거나 뒷정리를 도왔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게서는 항상 기름 냄새가 났다. 매캐하게 풍기는 삶의 찌든 냄새가 집안 곳곳에 배어 조금은 역한 생활의 고됨을 풍겼다. 그 냄새가 너무 싫었다. 옷에도 배어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는 그것이 마치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일깨워주는 듯 라테오를 천천히 옭아매었다. 부모님이 출근하고 나면 느지막이 일어나 항상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도했지만 기름 냄새보다 더욱 역한 물비린내가 들이닥쳐 금세 문을 닫았다. 별거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의 기억은 라테오의 내면 깊숙이 자리해 잊을 만하면 찾아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괴롭혔다.
라테오는 침대에 멍하니 앉아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민원인에게 호된 일을 당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죽을 용기가 없어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그였기에 감봉 따위의 징계는 두렵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최근의 일은 그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뽑히지 않았다. 분명 그의 말에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심하게 라테오를 괴롭히는 것은 카엘룸의 주민과 자신의 차이를 명확히 인지했다는 데에서 기인하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갇힌 기분이 그를 지배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 지독한 외로움과 허무함이 공중에 맴돌았다. 창문 밖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카엘룸이 햇빛을 가리나 보다. 정오가 되면 태양과 카엘룸, 아랫마을이 정확히 일직선을 만들어 밤이 온 듯 어두워지곤 한다. 라테오는 불현듯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미친 듯이 서랍을 뒤졌다. 분명 남은 약이 있었을 텐데, 속을 게워내듯 물건을 바닥에 던지며 한참 약을 찾던 라테오는 구석에서 푸른빛이 도는 앰플 하나를 발견했다. 언제 사둔 것인지, 무슨 약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입에 털어 넣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생각보다 걸쭉한 질감에 구토감이 들었다. 점차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몸에 힘이 빠지면서 손끝이 저린다. 문득, 카엘룸의 디저트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졌다. 민원인의 말대로 아랫마을과는 차원이 다를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최고의 품질을 위해 생산 단계부터 철저히 관리하고 장인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다는데, 살면서 먹어볼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라테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알마샤르의 잘난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언제 봐도 빌어먹게 잘생긴 얼굴이다. 보기만 해도 화가 풀리는 그를 마주한 민원인의 반응이 궁금했다. 여전히 화를 낼까? 아니면 사랑에 빠진 소년의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볼까. 같은 아랫마을 출신에 시궁쥐이지만 그가 못내 부러웠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뭘 그리 보는 거야.”
알마샤르는 머쓱한 듯 얼굴을 매만졌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모양이네. 너 약 잘못 먹고 쓰러졌어. 내가 마침 너희 집에 안 들렀으면 어쩔 뻔했냐, 응? 아무리 급하다 해도 유통기한 지난 약을 먹으면 어떡해. 집이 아주 난장판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 강도라도 들은 거야?”
라테오는 어이가 없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나란 놈은 약 먹는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는 모양이네, 차라리 그대로 죽었으면 창피한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자괴감과 수치스러움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에, 진짜 미치기라도 한 거야? 웃다가 울다가 아주 난리네. 기분은 좀 어때. 10m쯤 되는 관을 목 안으로 집어넣어서 여러 번 왕복하던데,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오더라. 사람 몸에 그게 다 들어간다는 게 말이 되나 싶더라고.”
그는 소름이 끼친다는 표정으로 몸서리를 쳤다. 고맙게도 이 마음씨 좋은 친구는 동료 시궁쥐를 위해 자리를 지켜준 모양이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 아무리 나라고 해도 혼자 계속 떠들기는 부담스럽단 말이지. 아, 그나저나 이거 받아.”
알마샤르는 계면쩍다는 듯 상자 하나를 건넸다. 상자에는 라테오가 민원인에게 가져갔던 제과점의 이름이 멋들어지게 적혀있었다. 하얀 생크림 위에 장식용 초콜릿 하나가 올려진 케이크, 라테오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다.
“먹어도 되나 싶지만, 빈손으로 병문안 오기는 좀 그래서……. 다 나으면 먹어. 이거 좋아하잖아.”
라테오는 물끄러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끔찍한 기억 탓인지, 아니면 속을 게워내서인지 먹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알 수 없는 열망 같은 것에 지배당해 케이크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감동한 것이라고 멋대로 해석한 알마샤르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테오는 한참을 더 케이크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나, 카엘룸의 디저트가 먹고 싶어. 위에 딸기가 올려진 생크림 케이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