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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Oct 10. 2024

필멸의 방정식 2부(11)

케이크 한 조각

라테오와 알마샤르는 마지막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돌아가자고 약속하며 각자 민원인에게 향했다. 라테오의 민원인은 카엘룸 외각 20 구역에 살았다. 카엘룸은 중심지부터 나선형으로 뻗어 나가는 달팽이 모양으로 구역을 구획하였다. 20 구역은 외곽에서도 중심 구역과 가장 멀리 떨어진 한적한 지역으로 편의 시설을 제외하면 거주 시설만 위치한 완벽한 주거단지다. 라테오는 이곳에 들어가는 게 죽을 만큼 싫었다. 마치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 이곳에 진정으로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적나라하게 들었다. 평생 자신이 이 사람들과 섞일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그런데도 이 구역에만 들어오면 현실이 잔인하게 다가와 그를 난도질했다.  

저 멀리 민원인이 보인다. 제 분을 못 이겨 집 앞에 나와 발을 구르며 마당을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온다. 씨근대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서 우울감과 무기력함의 단면조차 발견할 수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일부러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척 발걸음을 늦춘다. 이 무력한 반항이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갈 데 없는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몸 안 깊숙이 파고들어 터져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딴청을 피우는 라테오를 민원인이 발견했다. 지난번에도 늑장을 부리다 ‘5월의 불친절 직원’에 선정되어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이번 달도 떼 놓은 당상이다. 이럴 때는 극한의 저자세로 밀고 나가야 한다.   


“아이고, 사장님. 제가 길치라 댁까지 오는 길을 깜박했지 뭡니까.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민원인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을 부라린다.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이것까지는 꺼내지 않으려 했건만, 어쩔 수 없나.   


“약소하지만 사장님께 드릴 선물 하나 가져왔습니다. 이거 받으시고 노여움 거두시지요. 카엘룸에 비할 수 없겠지만, 아랫마을에서 나름 잘 나가는 디저트 가게에서 어렵게 구했습니다.”  


라테오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케이크 하나를 꺼냈다. 가격이 비싸 정작 자신은 일 년에 한두 번 기념일 때나 챙겨 먹는 것을 건네야 하니 속이 뒤틀렸다. 아무 말 없이 케이크를 받아 든 민원인은 잠시 라테오를 바라보더니 슬쩍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성공인가? 한숨 돌렸다 싶은 그때, 민원인이 케이크 상자를 열어 바닥에 쏟아버렸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멍하니 케이크의 잔해와 민원인을 번갈아 본다.   


“어이, 먹어봐.”  


민원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나보고 이걸 먹으라는 건가? 바닥에 떨어져 처참히 뭉개진 쓰레기를? 시야가 뿌옇게 물들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민원인은 발로 케이크를 천천히 뭉갰다.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못 먹겠지?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가져와.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건 더러운 너희 동네에서 많이 먹으라고, 이 쥐새끼.”  


라테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청난 모멸감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빈약한 언어 체계로는 지금의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심약한 그의 성품으로는 고함을 내 본 적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차라리 내가 그냥 데이터였다면, 밀려 들어오는 정보에 묻혀 저장공간이 부족해질 때 삭제당할지라도 자유로이 전파세계를 떠돌다 사라져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입을 다물어? 감히? 뭐라도 말을 해봐, 이 더러운 기생충 자식. 너희들이 누구 덕분에 그렇게나마 빌어먹고 사는 줄 알아? 필요 없고, 담당자 오라 해 담당자!”  


수치심에 몸이 떨렸지만, 실은 그가 부러웠다. 거침없이 뱉어내는 그의 태도에 동경심까지 들었다. 그처럼 누군가를 짓밟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민원인처럼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며 살고 싶었다. 라테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통신기를 들어 긴급 호출을 눌렀다. 말 그대로 긴급한 상황일 때 자신의 소재를 알리기 위한 기능인데, 일개 공무원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재난안전국 소속 공무원들은 이를 팀장이나 실장을 호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곤 했다. 통신기가 진동하며 신호가 갔다. 곧 카엘룸에 상주하는 상급자가 뛰어올 것이다. 아마 20분 정도 걸릴 터인데, 그동안 민원인과 함께 도로 한복판에서 신파극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위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하나둘 시선이 느껴진다. 자극이 부족한 이곳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처량한 몸부림은 저녁 식사에서 하나의 우스갯소리로 전락할 것이다. 이 민원인은 동네 모임에서 라테오의 처참한 꼴을 비웃으며 무용담을 늘어놓겠지.   


“뭐 해, 꺼지지 않고.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다행히 그가 축객령을 내렸다. 라테오는 소매로 눈물을 감추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물건을 한데 모았다. 옷에 끈적하고 기름진 케이크 시트와 크림이 잔뜩 묻었다. 아마 지우려면 전문 세탁점에 맡겨야 할 것이다. 호통이 다시 떨어지기 전에 짐을 챙겨 부랴부랴 떠났다. 가래침을 바닥에 뱉는 소리와 비웃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목덜미가 타들어 가는 듯 아파져 왔다. 20 구역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버스에서 라테오는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버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인으로 움직이는 버스였기에 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라테오는 한바탕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오갈 데 없는 온갖 감정이 속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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