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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Oct 15. 2022

국립 무용단의 <묵향>에 대한 감상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 유약해 보이지만 곧게 자라는 난초, 초겨울에 피어나는 국화, 사시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대나무.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연물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물어보면 청아함, 아름다움, 조화로움 등 다양한 의견을 낼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4가지 자연물에서 ‘군자’의 모습을 찾았다. 그들에게는 계절의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곧게 자라나는 모습이 군자의 덕목인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국립무용단의 공연 <묵향>은 이러한 선비정신을 현대에 계승하여 관객의 삶에 군자의 덕목을 은근히 스며들게 한다.

묵향을 보기로 결정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2017년 당시 무용이나 연극 같은 무대 공연에 관심이 없던 나에게 대학교 선배가 대뜸 표를 건네준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공연이었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했기에 공연을 보기 전 아무런 사전조사나 기대 없이 공연을 보러 갔다. 지금이야, 잘 모르면 철저히 사전조사를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지만 과거의 나는 오만하게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채로 봐야 감동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묵향을 처음 보고 느낀 감정은 ‘압도적’이라는 감각이었다. 진한 색감과 중후한 음색, 그에 맞춰 무용수들이 뿜어내는 묵직한 아우라는 관객을 압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공연에 대해 많은 조사와 사색을 한 후 보고서를 쓰는 지금 묵향에 대한 이미지는 유려한 중후함이다.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기 위한 짜임새 있는 구성, 무용수들의 자연스러운 호흡과 부드러운 움직임의 조화, 그리고 여유 있고 정갈한 마무리는 이전의 압도감을 중화시키기엔 충분하였다.

 묵향은 남자 무용수들의 묵직한 군무로 막을 열었다. 느릿한 호흡과 동작, 순백의 배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이 멎을 듯한 중후함과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다음 장에서 등장한 여성 무용수들의 ‘매화’는 섬세하고 맑은 음악 속에서 피어내는 꽃처럼 아름다운 장이었다. 새하얀 배경 속에서 점차 색을 더해가는 무용수와 영상은 마치 눈 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매화를 보는 것 같았다. 3장은 난초였다. 난초에서는 남녀 무용수들이 나와 각자 다른 멋을 뽐냈다. 묵 빛의 한복을 입은 남자 무용수들이 정갈하고 아름다운 녹 빛의 한복을 입은듯한 여성 무용수와 어울려 마치 난초를 보고 종이에 먹으로 난초를 그리는 선비의 모습처럼 단아하고 곧은 모습을 연출했다. 4장 국화에서는 샛노란 치마를 입은 여성 무용가들의 아름다운 무용이 이어졌다. 매화와 비슷하게 새하얀 배경을 노란 색감으로 뒤덮어가는 연출은 겨울에도 굴하지 않는 국화의 절개를 드러낸 듯하였다. 5장은 오죽이었다. 철릭을 입은 남자 무용수들이 기다란 오죽을 들고 나와 마치 무술을 하듯 절제되고 역동적인 군무를 펼쳤다. 이전 장들과는 다른 역동성이 보여 가장 집중해서 보았던 것 같다. 마지막은 종무였다. 종무에서는 모든 무용수들이 나와 공연을 마무리하는 듯하면서 여운을 남겨 생각할 거리를 주었던 것 같다. 묵향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배경의 영상미와 전통의 모던함인 것 같다. 묵향은 각 장을 특징지을 수 있는 문양으로 순백의 배경을 채워나갔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또한 묵향은 한국만이 가지고 있던 모노톤의 이미지를 모던함과 잘 연결 지어 매우 아름답게 사군자를 표현한 것 같다. 묵향은 마치 종이에 먹을 채워가듯이 담담하고, 때로는 역동적인 공연이었다.


이 훌륭한 공연을 선물해 준 선배, 이 공연을 유튜브에 올려준 국립무용단, 그리고 알고리즘의 선택에 두 번 감사하며 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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