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사과 Nov 01. 2022

아주 주관적인 한국기행

나의 수원화성 답사기

미니어처


나는 한 나라의 정체성과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성과 궁을 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나라마다 기후와 생활 방법의 차이가 있어 건축 양식이 상이하다. 성과 궁은 한 나라의 얼굴이며 그 나라가 가진 건축 역량의 총집합이기 때문에 그 문화권의 색채가 진하게 묻어난다. 그렇기에 나는 여행을 가면 고성이나 옛 왕궁을 둘러보고 박물관에서 해설을 듣는 코스를 꼭 집어넣는다.


  2017년 봄 대만에 갔을 때 미니어처 전시회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중정기념관 (장제스를 기리는 대만의 관광명소 부근을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발견해 들어간 곳이었는데, 미니어처 작품들의 섬세함과 창의력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작고 귀여운 모형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빠진 부분 하나 없이 완결성 있게 만들어져 있어서 참 섬세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화성도 미니어처 같았다. 물론 실제로 답사하면서 본 수원화성은 생각보다 거대하고 웅장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기억에 남은 수원화성에 대한 이미지는 스케일에 대한 경탄뿐 아니라 구조물과 성벽이 풍기는 아기자기한 매력도 있었다. 수원화성은 잘 만든 거인의 미니어처 같았다.


장안성에서


11월 아침 일찍 수원화성에 답사를 갔다. 분당선 매교역에서 2번 출구로 나온 다음 25번 버스를 타면 장안문에서 내릴 수 있다. 장안문은 수원화성의 정문이자 4대 문 중 북쪽에 위치한 문이다. 정조는 수도라는 뜻과 더불어 자신이 만든 신도시인 화성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태평성대를 누렸으면 하는 마음에서 ‘장안’이라고 이름 지었다. 장안문은 수원과 한양을 연결하는 관문의 중요성 때문에 옹성과 적대를 설치하여 효과적으로 성문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 장안문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성문을 자랑하였지만 6.25 당시 포격을 맞아 파괴된 이후 정조대 기록문화의 꽃인 [화성 성역 의궤]를 바탕으로 1979년 복원되었다.

 

밑에서 장안성을 바라보니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림자와 끝없는 성벽들이 내 시야를 훌쩍 넘겨 숨 막힐 듯한 웅장함이 나를 압도하였다. 하지만 이내 장안문 앞을 감싸는 옹성의 특유의 곡선적인 구도 때문인지 이내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장안문을 보는 내내 정조와 실학자들의 왕의 권위와 그 속에 담긴 애민 정신을 한데 어우러지게 지으려 했음이 보이는 듯했다. 장안문을 통과해 뒤로 들어가 보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있다. 장안문 2층 누각에 서서 수원시내를 바라보는데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할 때라는 신호처럼 뒤로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장안문을 지나 화서문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안내문에 나오는 권장 코스는 화서문 부근에서 화성 안쪽으로 들어가 화성행궁 쪽으로 들어간 다음 팔달문을 지나 화성 박문관 쪽으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정한 코스는 화성행궁을 지나지 않고 원형의 성벽을 따라 계속 걸으며 수원화성의 4대 문과 성벽 구조물들을 보는 것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그 당시 사람들의 시선으로 구조물들을 실제로 보는 것이 화성을 느끼고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방어의 중심지


일반적으로 유럽의 성이라고 하면 영지에 성 하나만 우뚝 서있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 성은 전형적 중세 이후 봉건사회 지배자의 무장 주거지로서 발달하였다. 이에 유럽의 성은 영주의 주거, 성이 구축된 지역의 방어시설로서의 한 요소, 비상시 영지민들의 피난처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서유럽에서는 11세기 이후 이민족의 침입 때문에 침체되어 있었던 교역이 다시 활발해짐에 따라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영주의 성 주변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지키기 위해 성이 확장되어 성곽을 지닌 도시의 형태가 되었다. 한국의 성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을에 쌓은 읍성과 전쟁에 대비하여 건설한 산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사람들은 읍성에 살다가 침입이 있으면 산성으로 이동하여 적을 대비했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기존 한국의 성과는 다르게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설립 초기부터 계획적으로 생활공간과 방어시설을 포함시켜 건조한 건축물인 것이다.

즉 서양의 도시와 한국의 성곽 모두의 성격을 가지고 있.  

수원화성의 길다란 성곽과 그 안의 생활 공간을 찍은 것이다. 군사시설인 성곽이나 공심돈과 민가의 대비, 현대식 건축물과 조선시대 건축물의 대비가 뚜렷하다.

수원화성은 지리적으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에 해당한다. 이에 수원화성은 필수적으로 다양한 방어시설을 설치해야 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성곽을 쌓아야 했다. 즉 방어의 중심지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에 화성의 설계자인 정약용은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화성의 성곽을 완성했다. 실제로 성벽의 높낮이가 구릉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며 그리고 공심돈이나 치 같은 방어시설들은 자연지형에 따라 가장 효율적으로 설치되어있다.  


수원화성의 특징적인 방어시설로 공심돈이 있다. 공심돈은 적의 동향을 살필 수 있는 망루임과 동시에 공격도 가능한 시설이다. 기본적으로는 4면인 석재 건축물이며 중앙부에는 병사들이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비어 있고 최상부에는 병사들이 숨거나 쉴 수 있도록 누각이 세워져 있다. 또한 병사의 수, 지리적 위치 등에 따라 유동적으로 축조했다고 한다.

수원화성의 또 다른 방어시설로는 치가 있다. 수원화성에는 총 10개의 치가 있는데 장안문을 북쪽으로 하여 방위마다, 순서마다 이름을 붙였다. 치는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로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들을 막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치는 꿩을 말하는 것으로 꿩이 자신의 몸을 잘 숨기고 주변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장안문과 화서문에는 옹성이 있는데 이는 성문을 부수는 적을 측면이나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문 앞에 축조하는 방어시설이다. 항아리 모양같이 생겨서 옹성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이 옹성 옆에는 적대가 있는데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로 반은 외부로 돌출되어 있고 반은 성 안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적대는 적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기 위해 성곽보다는 높게 축조하였다고 한다.  


공심돈, 치, 옹성, 적대 같이 외부로 보이는 방어시설과 달리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진 군사시설도 있다. 암문이 그것인데,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군수 물자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하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화두 5개를 쌓아 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이면서 그 밑의 성벽에는 총 안을 두어 적을 감시할 수 있게 만든 봉둔, 군사적 요새지에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각루 등 수원화성에는 수많은 방어시설들이 있다. 지금 보면 마냥 아름답고 멋지기만 한 이 구조물들이 과거에는 전쟁을 대비한 시설이었다는 생각에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전쟁을 위한 시설이 현재는 아름다운 관광지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왼쪽부터 '치' 중 하나인 '서이치'와 암문 중 서암문이다.
옹성과 공심돈의 모습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화서문.


팔달문에서 동남각루까지


사전조사에서는 수원화성이 산책로이니 간편한 옷차림이면 충분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멋을 부릴 겸 단화를 신고 장롱 속에 고이 모셔 둔 코트를 꺼내 입었다. 하지만 화서문부터 슬슬 경사를 올려가며 시작된 산행은 서장대를 지나 팔달문 관광안내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그에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성곽, 구조물을 볼 정신도 없이 숨을 거칠게 쉬며 등산을 했다. 심지어 옷도 시상식에서나 볼 것 같이 단정한 코트를 입고 단화를 신었으니 불편함과 고통이 극에 달했다. 나의 부족한 사전조사 능력을 탓하며 정신없이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새 산행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행이 끝났다는 행복감도 잠시, 나는 또 하나의 난관에 봉착했다. 팔달문까지 가는 길은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의 성곽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길치가 아니라고 자부하며 살았기 때문에 오기로 무작정 길을 걷다가 결국 핸드폰을 꺼내고 말았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다.

남치에서 팔달문, 그리고 팔달문에서 동남각루 사이에는 길이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길은 있지만 성곽이 없어서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관광 안내도에서도 성곽을 따라 걷기보다는 화성행궁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한다. 나처럼 초행길에 권장 관광코스를 벗어나 자신만의 코스를 개척하는 사람에게는 난이도가 상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팔달문은 왜 성곽으로 이어져 있지 않고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일까?  


팔달문은 화성의 4대 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팔달문도 화성의 다른 문처럼 옹성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 주변에 성곽이 없으니 그 모습이 자못 앙증맞다. 하지만 앙증맞은 모습과는 별개로 본래 모습을 잃은 채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은 팔다리를 잃은 양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팔달문 주변에도 성곽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복원하려면 예산에 따라 주변 땅을 매입하고 철거해야 하는데 팔달문 근처 유동인구가 만만치 않고 땅값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매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성곽들, 특히 장안문 근처에는 유동인구가 많은데 어떻게 매입하고 복원을 했냐고 물어보면 땅값이 예산에 맞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실제로 팔달문 근처에 가면 팔달문시장과 영동시장, 지동시장, 못골 종합시장 등 수많은 시장과 상인들이 물건을 팔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다. 왁자지껄한 시장을 가로질러 다음 성곽을 찾아가면서 팔달문의 유명세로 만들어진 시장 때문에 팔달문의 복원이 힘들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보고 정조가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넘치는 애민 정신으로 포용할까? 아니면 불같이 화를 내며 말세라고 혀를 찼을까? 뒤를 돌아보니 복원을 기다리며 오도카니 서있는 팔달문이 내심 안쓰러워 보였다.  

길 위에 덩그라니 놓여있는 팔달문의 모습이 외로워 보인다.

동남각루에서 다시 장안문으로


팔달문을 지나 다시 장안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지여서 인지 아니면 실제로 경관이 평화로워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안문의 동쪽 부분은 매우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길게 이어진 성벽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고 드문드문 보이는 구조물들이 지루함을 희석시켜 주었다. 이 코스에서 볼 수 있는 경관 중 압권은 창룡문에서부터 연무대까지 넓은 안뜰에서 느껴지는 호방함과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의 아름다움이었다. 창룡문은 살짝 언덕에 있기 때문에 연무대까지 한눈에 보인다. 연무대는 병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당시 소문난 활터였다고 한다. 실제 면적으로 보면 그리 넓은 면적은 아니겠지만 탁 트인 하늘과 깔끔하게 정돈된 연무대가 한눈에 들어오니 자연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호연지기가 길러지는 듯하였다. 연무대에서는 활쏘기 체험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앞으로 지나가기 섬찟하여 이번만 예외를 두고 성벽에서 내려와 인도로 걸었다.

왼쪽이 창룡문, 오른쪽은 창룡문 안뜰에서 바라본 연무대이다.

이를 지나 볼 수 있는 방화수류정과 북수문은 내가 본 수원화성의 구조물 중에서 단연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지휘소의 역할과 정자의 역할을 함께하였던 방화수류정은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북수문은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과는 조금 상이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시원스레 흘러가는 물줄기에 햇살이 비쳐 부서지는 그 광경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수원화성을 걸으면서 하나 아쉽다고 느낀 점이 있었다. 너무 군사 시설만 보인다는 것이었다. 안내문의 설명들 또한 시설의 과학적, 군사적 우수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수원화성 자체가 성이고 군사시설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내심 이러한 성곽에도 정조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당시 답사를 하던 중에는 알지 못했지만 이후 자료를 조사하던 중 이 수원화성에는 정조의 애민정신과 함께 고도의 정치적 수법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이에 자신의 권력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는데 과거 왕이나 지배자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거대 건축물을 건축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이러한 맥락에서 지어졌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장할 때도 권력을 과시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수단이 한강에 설치된 배다리이다.  


이렇게만 보면 정조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한 공사를 시키고 배다리를 만드는 등 우리가 평소 알고 있는 선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민심과 권력 사이에서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지의 딜레마에서 정조를 구해준 것이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수원화성에 참여한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발상은 매우 혁신적이할 수 있다. 과거 조세 정책에는 국가에 납부해야 하는 것들이 세금뿐 아니라 군역, 용역 즉 노동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노동력에 따른 임금을 주어서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을 막고 오히려 충성심을 높인 것이다. 수원화성의 성곽 자체는 군사시설이 맞지만 그 시설을 만든 인부들과 백성들에 대한 정조의 마음이 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장장 4시간을 걸어 드디어 다시 장안문에 도착했다. 장안문에 다시 서서 잠시 오늘 여정을 되새겼다. 시대와 개인의 경험에 따라 해석에 개입되는 외부 요인, 제도, 문화가 다르기에 문화유산은 시대별로, 개인별로 다르게 해석된다. 내가 이 수원화성을 보고 정조의 정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고뇌를 느꼈지만 설명들이 너무 군사적, 과학적 가치만 역설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모든 사람마다 각자의 시선으로 문화유산을 감상할 것이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해석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은 그 이후의 일일 것이다.

수원화성은 아기자기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도심의 전경과 잘 어우러진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수원화성의 구조물마다 있는 설명과 수원화성 안내책자 참고

매거진의 이전글 국립 무용단의 <묵향>에 대한 감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