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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Jan 19. 2023

아주 주관적인 한국기행-제주도(3)

3박 4일 뚜벅이 제주 탐방기

3일 차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부터 바람이 거세지더니 급기야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2일 차까지의 만족감이 워낙 크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야속하게도 체크아웃 시간을 빠르게 다가오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바람이 어찌나 세었는지 우산을 펴는 것조차 쉽지 않더군요. 일정대로라면 버스를 타야 하지만 이 강풍과 추위를 뚫고 나아갈 자신이 없어 택시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로비에서 기다리니 도어맨 분이 옆에 붙어 대기하고 계셨습니다. 송구한 서비스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쭈뼛대던 중, 어느새 택시가 도착하고 도어맨 분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가 택시 문을 열어주십니다. 마지막까지 대접받고 가는 기분이라 제주도에 대한 좋은 기억이 하나 더 남게 되었습니다.


3일째-감동과 감격 그 어딘가
오늘 일정의 시작은 [서귀포 매일올레시장-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특별자치도 중앙로62번길 18]입니다.


저는 여행을 떠나면 항상 지역의 전통시장을 들르는 편입니다. 평소 마트에서 장 보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전통시장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고장의 명물이 있기 마련이라 그렇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 신나게 매일올레시장으로 돌진합니다. 입구에서부터 고소한 군것질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호떡과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가 보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고수는 본능에 휘둘려 선택하지 않습니다. 꾹 참고 유혹의 난관을 지나 시장의 중앙에 도달했습니다. 미리 검색한 결과 '감귤찹쌀떡'이라는 아주 군침 도는 녀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통 이러한 것들은 애초에 동나기 마련이라 발걸음을 재촉해 고개를 휘휘 돌리며 떡집을 탐색했습니다. 그때 발견한 [할머니 떡집]이라는 상호. 부끄러움도 잊은 채 떡집 할머니를 붙잡고

"감귤찹쌀떡! 하나요!"를 외쳤습니다.

할머니는 익숙하신지 가판 뒤에 숨겨둔 곳에서 '감귤찹쌀떡'을 꺼내주었습니다. 탐스럽게 생긴 게 당장 한 입 베어 물고 싶었지만 저녁에 어제 사둔 차와 함께 마실 생각을 하며 다시금 난관을 넘겼습니다.

탐스럽게 생긴 감귤모찌.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배를 채울 차례입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닫은 가게가 왕왕 보여 아쉬움이 컸습니다. 조금 특별한 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결국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그런 우리 앞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네거리 올레]와 [깡통화덕]. [네거리 올레]는 김밥 위에 돈가스를 말아놓는 형태의 음식을 팔고 [깡통화덕은] 구운 만두를 파는 가게입니다. 저는 소시지 롤까스와 돼지문어 만두를 골랐습니다. 두 음식 모두 따끈하고 든든하니 속을 채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라 이색적인 느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앞에서 먹고 있으니 휴지며 물이며 소스까지 자꾸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쓰레기도 니 거 내 거 없이 한 집에서 받아 버려 주시니 전통시장에서 느낄 수 있는 정겨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배를 채웠으니 남에게 베풀 차례겠지요. 시장을 돌아다니며 소품샾을 구경하고 이런저런 선물과 주전부리를 좀 샀습니다. 만약 초콜릿이나 과자를 사실일이 있다면 [전주상회]를 추천합니다. 노부부가 하시는 작은 가게인데, 인심은 그와 반비례하여 후해도 너무 후하십니다. 자꾸 따라다니시면서 주전부리를 손에 쥐어주시는데 그 자리에서 다 먹기 힘들 정도로 주셨습니다. 게다가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저를 붙잡으시며 초콜릿 3박스와 과자 하나를 얹어 주십니다. 괜스레 코 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오른쪽 사진이 서비스로 받은 것들입니다.
두 번째 일정은 [동백 포레스트-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1751-2]입니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꽃이 무엇일까요? 아마 대부분 유채꽃과 동백꽃을 떠올리시리라 생각합니다. 제주도에서 가장 산뜻한 색감을 담당하는 유채꽃을 보기에 아직 이른 시기라 동백꽃을 보러 갔습니다. 이르면 2월부터 유채꽃이 핀다고 알고 있었는데 제주도를 돌아다니다 보니 유채꽃의 어린 꽃망울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민들레도 육지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심지가 굵어 보였고 이름 모를 식물들의 잎과 줄기가 두꺼웠습니다. 제주도의 강한 바람을 견디며 강인한 성장을 이룩한 그들에게 작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이런 사소한 부분을 놓치게 되는데, 뚜벅이로 여행을 떠나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겨 이러한 감상이 문득 찾아옵니다.


동백 포레스트는 동백꽃이 아름답게 심어진 밭으로 다홍색과 초록색의 아름답고 진한 조화를 감상할 수 있는 관광지입니다. 뚜렷한 색감이 사진을 화사하게 만들어주어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5천 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입구 왼쪽에 카페가 하나 보였습니다. 얼어버린 몸을 녹일 겸 들어가려 했는데, 건물을 빙 두를 만큼 엄청난 줄이 늘어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카페에 줄이 그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어려운 소심쟁이라 쭈뼛거리며 줄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그런데 가족으로 보이는 한 팀이 줄을 서지 않고 그냥 카페로 들어갑니다. 급히 동행자에게 줄 서기를 부탁하고 군 시절 CQB 하던 기억을 살려 기도비닉을 최대한 유지한 채 들어가 보았습니다. 어이없게도 카페는 한산했습니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모두 카페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유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자리를 잡고 동행자를 불렀습니다.

동백꽃이 만발했습니다.
명당에서 수줍게 사진을 찍어봅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 몸이 녹아 동백꽃의 화려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진한 다홍색의 꽃잎이 윤기가 흐르는 초록색의 나뭇잎 사이사이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꽃잎 사이로 샛노란 술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각각의 존재감이 확실한데 이리도 잘 어울릴 수 있다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창문을 통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니 찬 공기가 폐부를 깊숙이 찌릅니다. 고통스러워할 겨를도 없이 색감의 향연이 눈앞에 펼쳐져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꽃 향기를 맡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 자세를 보니 의문이 들었습니다. 꽃이 이렇게 만발했는데 주변에 자욱한 꽃향기를 맡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꽃다발을 사러 꽃집에만 들러도 진한 꽃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데, 이 넓고 빽빽한 동백꽃의 바다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의아함에 바로 찾아보니 동백꽃은 원래 향기가 없다고 합니다.


동백꽃은 곤충이 별로 없는 시기에 만발하기에 조매화(鳥媒花)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새는 곤충보다 신진대사량이 높아 꿀을 많이 먹는데, 이 때문에 꽃이 품고 있는 꿀의 양이 많습니다. 대신 많은 꿀의 양을 얻어 향기를 포기한 것인지 동백꽃은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내주어야 하는 법, 이렇게 동백꽃에서 또 하나 세상을 알았습니다. 의문도 해결했으니 사진을 찍어야겠지요. 꽃이 많이 핀 곳을 찾아 서로 거치대가 되어주고 풍경을 담다 보니 어느새 주변으로 사람이 많이 몰려듭니다. 아마 명당을 찾아와 기다리시는 분들이었겠지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빠져나와 다음 장소로 향했습니다.


동백꽃의 아름다움에 홀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숙소로 가 짐을 풀고 끼니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번 숙소는 성산에 위치한 [오조리비앤비-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로 42]였습니다.


성산에 내리니 확실히 바람이 거셉니다. 건장한 성인 남성인 제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실 겁니다.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버스를 타고 저녁식사를 하러 이동했습니다. 저녁 메뉴는 생회로 정했습니다. 사실 회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걱정했습니다. 다만 동행자가 이 집은 곁들임 반찬도 푸짐하고 회가 신선해서 맛있을 거라 장담하여 마지못해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 너머로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곳에 [쌈총사 횟집]이 오도카니 서있습니다. 유명한 맛집이라 하여 잔뜩 기대했지만, 기대와 달리 내부는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백반집 분위기입니다. 생회에 익숙한 동행자가 오자마자 전광석화로 방어를 주문해버리고 저는 멀뚱히 앉아 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집, 곁들임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전복, 타코와사비, 해삼, 오징어 숙회로 이루어진 기본 반찬에 산더미 같은 오징어 튀김, 크림새우가 연달아 나옵니다. 심지어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생선 탕수가 식탁을 덮어버려, 회가 나오기도 전에 곁들임 음식으로 이미 식탁이 가득 찼습니다. 허겁지겁 음식을 해치우고 있자니 아주머니가 거대한 접시를 들고 나오십니다. 채소 무침으로 방어회를 가득 두른 형태입니다. 놓을 자리가 없어 아주머니는 옆에서 기다리고 계시고 부랴부랴 음식을 위에 쏟아 넣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방어회의 시간입니다. 은회색의 살에 살짝 핏기가 도는 게 회에 익숙하지 않은 저로서 다가가기 어려운 행색입니다. 용기를 내어 한점 집어 들고 마늘기름장에 듬뿍 찍어 입에 넣었습니다.


정말 감탄이 나오는 맛이더군요. 기름진 살점은 씹을 때마다 감칠맛을 뿜어내고 탱글하고 아삭한 식감이 입을 즐겁게 해 줍니다. 생선 비린내는 일절 찾아볼 수 없고 불쾌할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곁들임 음식도 충분히 맛있지만 이 녀석을 다 먹기 전에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방어에 기름이 잔뜩 올랐는지 조금 느끼해집니다. 그럴 때 제주의 로컬 소주인 한라산으로 입을 헹궈주면 다시 개운해집니다. 정신 못 차리고 계속 흡입하다 보니 어느새 한점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동행자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 그릇에 마지막 남은 한 점을 올려줍니다. 왠지 모르게 패배감이 들었지만 어쩌겠습니까, 맛있는 것을. 끝으로 매운탕까지 해치우고 쏟아질까 두려운 배를 움켜쥐며 만족스럽게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양과 맛이 어마어마합니다.

잠시 소화를 시키고 마주 앉아 차와 감귤찹쌀떡을 후식으로 꺼내듭니다. [오조리비앤비]는 [민박집 섶낭]과는 다른 의미로 정갈하고 정감 가는 숙소였습니다. 침대 대신 매트리스가 바닥에 놓여있고 잠자리 위로 커다란 창문이 성산일출봉을 겨누고 있습니다. 특이하게 작은 쪽방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좌식 식탁과 방석이 마련되어 있어 여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오늘 하루도 너무 만족스러운 일정이었습니다. 거센 바람과 추운 날씨가 이동을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온기가 가득 퍼지는 제주도에서의 날입니다.

[오조리비앤비]입니다. 성산일출봉이 창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한폭의 수묵담채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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