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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May 05. 2023

존윅 4 리뷰

개 한 마리의 값어치

전설의 킬러에서 자상한 남편으로, 그리고 다시 바바예가로

85명, 존윅이 시리즈의 3편 <존윅 : 파라벨룸>에서 죽인 사람의 수이다. 1편인 <존윅>에서 77명, 2편인 <존윅 : 리로드>에서 128명을 죽이며 갱단, 마피아, 킬러들을 상대로 대학살극을 펼친 존윅의 일대기는 이번 4편에서 마무리를 짓는다. 은퇴한 킬러이자 자상한 남편이 되기를 꿈꾸는 존윅은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에 젖어든다. 그런 그에게 도착한 아내의 마지막 선물은 작은 강아지. 존윅에게 남은 것은 그 작고 연약한 생명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혹은 이전까지의 피폐한 킬러로서의 삶은 청산하고 보상받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해 강아지를 돌보기로 결심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뉴욕에 둥지를 튼 러시아 갱단 보스의 아들이 존윅에게 애마를 팔라는 요청을 하지만 이를 거절한 존윅에게 복수를 함과 동시에 그의 강아지를 죽여버린다. 존윅은 킬러 세계에서 나가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마지막 남은 삶의 목적이 사라지자 복수를 결심하고 다시금 세계에 발을 들인다.


1편에서 러시아 갱단을 박살 낸 존윅을 향해 '하이 테이블'이 손을 뻗는다. 청산해야 할 빚이 있다며 그에게 의뢰를 요청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은퇴한 이후 삶을 건설하기를 간절히 바라던 열망이 있던 존윅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의뢰를 수락한다. 그 의뢰가 복수의 칼날이 되어 자신을 겨눌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의뢰를 마무리 지은 후 다가오는 복수극에도 존윅은 담담히 다가오는 모두를 물리칠 뿐이었다. 결국 자신을 킬러 세계로 다시금 발을 들이게 한 원흉을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죽이며 2편이 마무리된다. 문제는 그 원흉을 죽인 장소가 '콘티넨탈 호텔'이며 이곳은 킬러들의 세계에서 성역 취급을 받으며 절대 살생을 해서는 안 되는 장소라는 것이다. 이렇게 존윅은 킬러들의 세계와 전면전을 선포한 꼴이 된다. 단지 자상한 남편이,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긴 마지막 선물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그는 다시금 킬러 시절 '바바예가'였던 자아로 돌아가게 된다.


3편은 존윅이 도망치고 또 도망치며 킬러들의 세계를 관장하는 '하이 테이블'의 장로를 찾아 사면받기 위한 사투를 그린다. 전편의 일로 엄청난 현상금이 걸린 존윅을 죽이기 위해 전 세계의 킬러들, 옛 동료들이 찾아오지만 존윅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물리친다. 단 1g의 사심도 담지 않고, 그저 기계적인 학살을 반복한다. 존윅의 외로운 학살극에서 누군가는 돈을 위해, 누군가는 전설을 죽였다는 명예를 위해 그를 쫓지만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과거의 인연들이 그를 도와준다. 뉴욕 컨티넨탈 호텔의 매니저 윈스턴과 컨시어지인 카론, 그리고 뉴욕의 지하에서 거지로 이루어진 암살단을 이끄는 킹이 그러했다. 그러나 강대하고 치밀하며 집요한 '하이 테이블'의 추격은 존윅뿐 아니라 그의 조력자 모두를 파멸의 길로 이끌었고 존윅은 컨티넨탈 호텔에서 윈스턴의 총을 맞아 바닥으로 추락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이 테이블'의 장로와 만난 존윅
바바예가에서 자상한 남편으로

지하의 거대한 공동에서 나무판자에 정권 지르기를 하는 존윅이 킹에게 슈트를 받으며 영화가 시작한다. 전편에서 '하이 테이블'의 수장이자 존윅을 가로막는 가장 강대한 적이 될 것이라 예상한 장로를 시작부터 죽이며 여전히 화끈한 전개를 선보인 존윅은 '하이 테이블'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아 가장 효과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존윅을 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빈센트 드 그라몽 후작'의 행보로 인해 제동이 걸린다. 과거 존윅의 동료이자 맹인이지만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살인술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케인', 남루한 차림이지만 집착에 가까운 조사를 통해 존윅의 숨통을 조여 오는 '미스터 노바디'까지 섭외한 그는 존윅을 한계까지 몰아붙인다. 결국 존윅은 윈스턴의 조언을 얻어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하이 테이블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고대의 방식인 '결투'로 자신의 서사시를 끝맺으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를 보증하는 '패밀리'와 '세컨드'가 필요한 상황. 존윅은 킬러의 세계에서 손을 씻으며 연을 끊은 패밀리인 '루스카 로마'를 찾아가 그들의 의뢰로 '하르칸'을 죽이며 결투를 성사시킨다.

왼쪽부터 메인 빌런인 그라몽 후작과 그에게 고용된 케인

해가 뜰 때 성당에서 결투를 하기로 한 존윅과 그라몽 후작. 하지만 그라몽 후작은 대리인으로 케인을 내세우고 동시에 존윅이 결투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파리의 모든 킬러를 소집하여 그가 성당에 올 수 없도록 막는다. 이때 수도 없이 밀려드는 킬러를 상대하며 파리 로터리 개선문-건물 에어뷰 CQB-성당 앞 계단으로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 결국 결투에 임하여 그라몽 후작의 비열한 수까지 모두 물리친 존윅은 계단을 내려오며 밝아오는 햇살아래 쓸쓸히 죽어간다. '헌신적인 남편'이라 적힌 묘비아래 헬렌과 나란히 묻힌 존윅을 킹과 윈스턴이 바라보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왼쪽부터 윈스턴, 킹, 카론. 존윅의 조력자들이다.
나름의 해석

존윅은 1~4편으로 이어지는 내내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죽은 아내의 마지막 선물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다시 자신을 킬러의 세상으로 이끈 갱단과 하이 테이블에 대한 복수, 이를 뚫고 평안을 얻기 위해 벌이는 처절한 사투. 존윅은 내면의 분노를 격양된 목소리와 고함으로 해소하기보다 묵묵히 총과 칼을 꺼내 다가오는 적을 몰살한다. 피비린내 나는 그의 학살극은 카리스마 있게 등장하는 킬러들조차 한낱 희생양에 불과하게 만드는 말 그대로 파괴의 화신인 것이다.


상대방의 변명 따위 듣지 않는 그의 자비 없는 손속은 우리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제공한다. '말을 한마디 나누기보다 존윅은 한 명이라도 더 죽인다.'라는 밈이 유행할 정도로 그의 파괴적인 행보는 거침이 없다. 게다가 주짓수와 현대 병기를 결합한 신개념의 액션, CQB의 정석을 따르는 침착하고도 부드러운 움직임, 그리고 여타 액션 영화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탄창 교체 및 보급을 위한 시퀀스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섬세하고 알차게 짜인 액션의 맥락은 존윅이 왜 최고의 킬러이자 전설로 불리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기계적이면서 압도적인 존윅의 서사시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에게 몰입하여 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 정도 능력을 가지고 그만큼의 비극을 겪었으면 그럴 수 있지, 어차피 킬러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상관없지, 라며 말이다. 그의 행보에 정당성을 추가하는 것이 바로 존윅의 독특한 세계관이다. 그러나 그 정당성과 개연성은 존윅의 학살극에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존윅 2에서 구체화된 세계관은 너무나 부조리하다. 기껏해야 사람을 죽이는 킬러들이 온갖 허세를 부리며 명예를 운운하고 의리를 입에 담는다. 어디 그뿐인가, 총을 난사하고 사람을 연필로 찔러 죽여도 뉴스 하나 나오지 않으며 지하철의 거지, 길거리 연주가, 우연히 잡아탄 택시 운전사 모두 킬러 세계와 연관된 사람들이다. 이쯤 되면 죽일 사람이 없어서 킬러들의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킬러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이 세계를 뒤에서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세력인 '하이 테이블'까지 등장하여 뒷세계의 존경과 두려움을 받는다. 그야말로 미쳐 돌아가는 세계관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세계관에 열광하고 개연성을 납득하는 것은 존윅이라는 영화의 장르가 '코미디'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배를 잡고 구르며 웃을 수 있는 직관적인 코미디 장르라고는 할 수 없다. 존윅은 어디까지나 진지한 액션을 위주로 한 복수극이니까. 존윅의 코미디는 '블랙 코미디'이다. 너무나 부조리한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어 마냥 웃을 수는 없지만 끝내 이 세상을 희화화하여 조롱거리로 만드는 그런 코미디, 이는 영화가 의도적으로 진지해지는 것을 막는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를 관람하던 중 4편의 성당 앞 계단 액션에서 굴러 떨어지는 존윅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안타까워하던 관객들이 존윅이 계속 굴러 떨어지자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언제까지 구를 거야!'라고 말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90년대 홍콩 영화에서 등장할 법한 터무니없이 낯간지러운 킬러들의 대사와 행동에서도 관객들은 진지함을 잃고 손사래를 친다. 영화 존윅은 우리가 진지해지길 원하지 않는다.  


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그랬듯이 존윅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코미디로 생각한다. 코미디는 반대되는 성격의 장르인 드라마와 다르게 깊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진지함이 생명이다. 인물의 서사에 개연성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관객이 몰입하여 결국 하나의 의미나 주제를 찾을 수 있도록 이끌어간다. 그렇기에 드라마에서는 스토리가 중요하며 액션이나 설정은 부가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반면 코미디는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도 크게 없다. 그저 그 순간을 즐기는 것, 다시 말해 깊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가볍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코미디의 핵심이다.


이러한 이유로 감독은 존윅에서 의도적으로 부조리함을 강하게 드러냈다. 키에르케고르부터 니체,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실존주의는 이 세계를 부조리한 것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극복으로 삶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키에르 케고르는 신에 의지해야 한다 했고, 니체는 노예 도덕을 벗어나 삶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는 주인 된 도덕의 행위자가 되어 힘에의 의지를 실현해야 한다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주의와 닮은 듯 다른 부조리주의를 외친 알베르 까뮈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부조리한 것이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 역시 또 다른 광신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까뮈는 인간은 세계의 무의미함과 부조리함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부조리함에 대항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자살이나 희망이 아닌 '반항'을 꼽았다. 시지프스처럼 끝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받치고 밀어 올리는 반항, 질서에 끝없이 반항하며 농!이라 외치는 인물 그것이 바로 존윅인 것이다.

존윅은 시지프스처럼 굴러 떨어지는 돌을 밀어올리며 담담하게 질서에 반항한다. 어떤 위협에서도 묵묵하게 걸어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존윅에게 대학살의 의미는 그저 개 한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를 발아래 두고 멋대로 휘두르는 '하이 테이블' 또한 그러하다. 그들이 얼마만큼의 노력을 들였건, 얼마나 진지하게 질서를 위해 헌신하건 존윅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존윅은 그들의 질서에 반항하며 개 한 마리와 세계를 같은 저울에 올린 것이다. 존윅 1에서 메인 빌런인 비고가 마지막에 차량에서 웃음을 터뜨린 이유도 이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러시아 갱단이 존윅에게는 그저 개 한 마리의 값어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자 허무함과 어이없음에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고 킬러들에게 공격을 당해도 끝내 자신들의 숨통을 조여 오는 존윅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계속 던져주는 '하이 테이블' 또한 질서를 세우고 의미를 찾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으니 존윅처럼 동정도, 감상도 보이지 않고 질서에 반항하며 다가오는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존윅 4의 미스터 노바디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미스터 노바디는 반려견과 함께 존윅을 추격하는 인물로 '돈'이라는 질서를 맹신한다. 존윅과 같이 엄청난 실력에 반려견을 매우 사랑하고 '하이 테이블'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나름의 가치관으로 행동하는데, 어찌 보면 존윅과 매우 닮아있다. 그러나 존윅이 파괴적인 행보에도 가장 위협적인 자신과 반려견보다는 다른 킬러를 우선하여 제거하는 것을 보고 그가 성당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저 반려견을 지켜준 데에서 오는 심경의 변화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결투에서 난입하지 않고 그저 부러운 듯, 못 당하겠다는 듯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통해 존윅의 질서에 대한 반항이 너무나 맹목적이며 '돈'이 끼어들 자리가 없음을 납득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3편에서 드러난 키치함을 줄이기 위해서인지 4편에서 드라마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감상적인 장면이 늘고 서사를 부여하며 존윅의 영웅설화를 정중한 태도로 맞이한다.


말이 길었지만 핵심은 그저 보고 즐기고 웃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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