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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Nov 26. 2023

필멸의 방정식(1)

프롤로그

기철은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파티홀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홀에서는 파티가 한창이었다. 파티의 주인공은 그의 연인 유진으로 그녀의 성공적인 전시회를 축하하며 뒤풀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유진과 수백 년의 시간을 함께 했지만 그녀의 영감은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처럼 고갈될 줄 몰랐고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해 이미 한 시대를 풍미할 예술가라며 평단의 극찬을 받고 있었다. 기철은 그 행태가 우스워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시대의 이름은 새로 태어난 이들이 과거를 추억하며 정의되는 것인데 죽음을 정복한 그들이 어떻게 한 시대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문득 오랜 친구 니시무라가 떠올랐다. 첫 만남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항상 곁에 있었던 그는 며칠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오래 살아서 감정이 무뎌진 것인지 그의 죽음에도 슬픔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끝이 도저히 보이지 않아 미뤄두었던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살아가는 것,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사랑을 나누고 관계를 맺는 이 모든 삶의 과정이 뚜렷하게 다가와 사는 게 진절머리 나게 느껴졌다. 이 형용할 수 없이 복잡하고 불현듯 스며드는 불쾌한 감정을 언어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이 죽음을 망각한 이후 죽음과 상실에 관련된 말이나 생각들이 점차 사라져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인간은 죽음을 정복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전쟁과 재해를 극복한 2050년을 기점으로 인류는 종적으로 최대의 번성기를 맞았다. 전례 없는 속도의 폭발적인 인구성장과 더불어 바이오테크의 극적인 발달이 이를 가능케 했다. 약물과 시술, 기계 임플란트를 통해 과거의 인간과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작별을 고한 인류, 계속해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 인류의 미래는 밝아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문제가 인식하기 전에 우리 곁에 와 있었다. 폭발적인 인구 성장은 과거 일부 대도시에서나 벌어지던 현상인 인구 과밀화가 전 지구적인 문제로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각국 정부로 하여금 새로운 정책을 도출하도록 하는 압박으로 작용했다.


각국의 정부가 모여 내놓은 해결책은 일명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였다. 전 인류의 수명을 크게 연장함과 동시에 불임시술을 통해 인구 증가를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전통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구수를 강제 조절할 수도 있었겠지만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지는 과격한 방법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가까스로 유지한 그들의 권력을 삽시간에 무너뜨릴 것이 뻔했다. 게다가 많은 인구수로 전 인류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현재 상황 자체를 고정시키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 당연히 반발이 있었다. 종교계와 진보 정당, 시민단체가 연합하여 인간에게서 죽음과 탄생을 앗아가는 이 오만한 정책을 비난했다. 또한 아직 인류가 이러한 기조의 정책을 받아들이기엔 보수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책의 발안자이자 바이오테크의 선구자인 Dr. Lee가 전면에 나서 진심으로 호소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프로젝트에 대한 그녀의 광신적인 믿음과 정부의 적극적인 프로파간다로 설득당한 대중은 어느새 스스로 시술을 받으러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젊음에 대한 환상과 삶을 향한 열망이 가득한 어린 연인이었던 기철과 유진도 앞서서 시술을 받았다. 그들은 죽음을 떠올리기엔 너무 어렸고 이후 태어날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걱정하기엔 재능과 열정이 가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더 숙고할걸 그랬나 싶지만 말이다.


불멸을 포기하면 되지 않겠냐만은, 죽음이 희화화되고 드물어진 사회에서 이는 오히려 미지의 공포로 다가와 삶을 강요했다. 그렇게 인간은 천천히 변화를 잃어갔다. 개체의 생명력은 무한에 가까워졌지만 종의 차원에서는 실패한 채, 지박령이 되어 도시를 배회하는 패배자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니시무라는 견디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으로 바라본 세상은 회색으로 가득한 죽은 세상이었을 테니까.


기철은 난간에 몸을 더 기댔다. 취한 것인지 평소보다 상념이 들끓었다. 유진, 그의 아름다운 연인은 여전히 파티에서 화려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그녀의 생명력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아니, 언젠가부터 더욱 불타올라 사랑스러운 젊음의 가루를 뿌렸다. 그녀 곁에 있으면 시술이 아니더라도 감히 죽음이 그녀를 앗아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기철은 어떠한가. 니시무라의 죽음 이후 심해진 우울감과 고뇌는 그의 생명력을 앗아갔다. 유진, 그리고 세상에 의미 있고 싶다는 뜻 모를 집착이 니시무라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기철을 붙잡고 있었지만 생명의 파릇한 기운이 점차 빠져나가 때로는 스스로 로봇이라도 된 듯 무감각해지는 느낌에 기철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 다만 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선택하지 못할 뿐이었다.


유진은 어느새 사라진 그녀의 연인이 어디 있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수백 년간 함께 하니 그의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여 행동을 예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 어느 음습한 곳에 숨어 청승을 떨고 있겠지. 이 아름답고 행복한 밤에 말이야. 잠시 고개를 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곧 테라스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곧 죽을 사람처럼 생기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유진은 테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최근 우울증이 더 심해진 기철이 못내 걱정되었다.


기철은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니시무라가 죽음을 선택한 후 혼자 있는 일이 잦아졌다. 본인은 숨기고 싶어 하는 모양이지만 유진은 니시무라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사교 모임에서 죽음을 선택한 과학자에 대한 으스스한 소문을 듣자마자 그것이 니시무라의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내세에 대한 숙고나 상실이 전해주는 아픔이 단지 한여름 밤의 괴담쯤으로로 치부되는 현실에서 애도의 분위기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니시무라가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은 유진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기철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며 놀라운 성과를 여럿 올린 유능한 연구원 니시무라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독신을 고집하는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함께 술을 기울이던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절친한 친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는 사람, 그것도 꽤  친분이 있는 사람을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남다른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그녀에게 우울한 영감을 전해주었다.


더구나 그 사건 이후 연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놀라울 정도로 예민한 감각은 기철에게서 풍기는 죽음의 향기를 맡게 했다. 눅눅하고 달콤한 지하실의 냄새처럼 버티기 괴롭지만 중독적인 것, 기철은 짙은 어두움과 고뇌에 둘러싸여 있었다. 유진은 창문 옆 기둥에 몸을 숨기며 할 말을 신중히 골랐다. 그러나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 계획 없이 커다란 캔버스를 마주했을 때처럼 막막함이 날아들어와 그녀의 자랑인 영감도 이 순간만큼은 무용지물이었다. 하기야, 경험하지 못한 감정을 어찌 섣부르게 공감한다 하겠는가.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오래 살았건만 상상력의 범주는 인간의 조악한 육체를 넘지 못했나 보다.


그녀는 인간의 태생적인 빈약함을 원망하며 조심스레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인기척에 기철이 머리는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유진은 마치 새벽에 몰래 과자를 꺼내먹다 걸린 아이처럼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왜 여기 있어, 추운데."


그녀는 말을 꺼내놓고 후회했다. 급하게 아무 말이나 내뱉었기 때문이겠지만,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말을 한 것이다. 마치, '연인이면서 자신의 전시회를 축하해주지 않고 왜 밖에 나와 청승맞게 굴고 있느냐. 어서 들어와 나를 빛내주어라.'라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미안, 걱정했어?"


기철은 그의 연인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한 말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 뻔했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변하지 않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버릇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걱정되어 파티를 떠나 이리저리 찾아 헤매었을 것이다. 기철은 고뇌에 빠져 연인을 혼자 남겨둔 것이 미안해졌다. 게다가,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를 떠나면 쓰나.


"당신 말대로 밖에 있으니 춥다. 들어가자. 찾아줘서 고마워!"


기철은 애써 쾌활한 척을 하며 파티장으로 향했다. 유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마주 잡고 검지손가락을 부딪혔다. 그녀가 난감하거나 긴장할 때 언제나 튀어나오는 습관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유진이 니시무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랜 시간 함께하니 상대의 상태가 약간만 바뀌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 모습을 본 게 언제였지, 아마 십수 년도 더 전에 그녀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보겠다며 기철의 실험도구를 마음대로 가져갔을 때일 것이다. 정작 기철은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건만 지레 겁을 먹은 그녀가 진수성찬을 준비한 채 정확히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유진이 저 행동을 보일 때면 한마디로 비상이라는 뜻이다. 상대의 용서와는 관계없이 본인의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저러고 있으니 말이다. 난감해진 기철은 몸을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기철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길게 끌어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


"으응, 아니야, 괜찮아. 춥네, 들어가자."


둘은 어색하게 사이좋은 연인을 연기하며 파티장에 들어섰다. 이런 자리를 즐기지 않는 기철이지만 긴 세월을 살아오며 처세술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마주하기는 했지만 기철의 속은 점차 썩어 들어갔다. 이들이 니시무라의 죽음을 알까?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와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삶과 죽음, 탄생이라는 생명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기철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움이 몰려와 얼굴을 굳혔다. 그의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챈 것은 역시나 유진이었다. 사실은 그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맞춰주며 집에 돌아간 후 홀로 우울에 빠지려는 멋진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생각 없이 살아갈 뿐인 기계들 사이에서 자신도 매몰될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이가 몸이 안 좋은가 보네요. 저희는 이만 돌아가볼게요. 편히 즐기다 가세요."


유진은 기철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요.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기철은 굳은 표정으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며 서둘러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아주 멋진 밤이 되었을 텐데. 그는 유진에게 너무나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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