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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Nov 26. 2023

필멸의 방정식(2)

프롤로그(2)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리무진의 뒷자리에 평소와는 다르게 떨어져 앉은 기철과 유진은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의 감정과 기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음에서 기인한 침묵은 역설적으로 그 순간은 더욱 깊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각자 창문을 응시하며 상념에 잠겼다.

기철은 니시무라의 죽음에 자신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얼어붙은 그들의 시간을 자각한 후 니시무라는 마치 꿈속에서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매 순간 받는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끝없이 이어진 어두운 터널을 받쳐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걸어가는 것 같다며 두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기철은 그때마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며 술집에 데려가 위로를 던질 뿐이었다. 원래 우리의 일이란 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아니겠느냐, 버티다 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니시무라를 챙겼어야 한다. 그의 친우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줘야 했다. 공감하고 함께 해결책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기철은 그러지 못했다. 니시무라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자신임을 알았음에도 선뜻 나서 도와주지 못한 것이 그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둘이 함께 연구를 하던 시절부터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기는 했다. 기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무시했다. 당시 기철은 자신의 은사인 리처드 박사의 권유로 원래 다니던 연구소를 나와 새로운 팀을 꾸리고 있었기에 너무나도 바빴기 때문이다.


기철은 원래 니시무라와 함께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의 연구원으로 있었다. 기철은 리처드 박사의 팀에, 니시무라는 Dr.Lee의 팀에. 리처드 박사는 Dr.Lee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석학 중 한 명으로 그녀가 주도하는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Dr.Lee가 바이오테크의 선구자로 프로젝트의 기술적인 측면을 담당했다면 리처드 박사는 자신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통해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하였다. 학부생 시절 철학을 전공하고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그는,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인간이 가진 잠재력은 전부 해방하지 못하도록 막는 유일한 제약이 죽음이라 생각한 것이다. 인류가 생존 욕구의 노예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비로소 사회와 자아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리처드 박사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가능케 할 Dr.Lee를 만나게 된다.


정부와 기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루어진 이들의 협업은 예상하던 것 이상의 결과를 불러왔다. 그들은 인류에게서 시간을 앗아갔다. 리처드 박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스스로 숭고한 선택권을 반납'했다. 아직 열정과 신념으로 단단히 무장했을 당시, 그는 역사에 남을 연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후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학파나 사상이 등장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프로젝트는 '역사'라는 개념을 지워버렸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줄 후대가 없어졌으며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죽음을 상실한 인류는 리처드 박사의 기대와 달리 인류를 초월한 무언가로 거듭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점차 키치 한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본질과 존재론적인 담론 대신 자기중심적이고 화려한 것을 좇았다.


껍데기만 가득한 세상, 망령이 휘몰아치는 유령도시, 그것이 리처드 박사가 마주한 새로운 세상이자 그들이 만들어낸 유토피아였다. 그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구토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인류에 큰 죄를 지은 듯한 죄책감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그를 감쌌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기철이었다. 기철은 리처드 박사의 연구팀 중 유독 눈에 띄는 이었다. 과거 미학을 전공했지만 과학계에 발을 들인 기철은 그의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특별하고 예민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집중할 때면 미간을 찌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에도 습관의 여파로 이마와 눈가에 짙은 주름이 나있었고 턱 주위의 근육은 과도하게 발달하여 각진 인상을 주었다. 한마디로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리처드 박사가 판단한 기철은 누구보다 날카로운 감성을 가지고 인류에 연민을 보이는 연구원이었다. 기철이 가져오는 보고서는 경직된 문체와 숫자의 향연에서도 숨겨지지 않는 애정이 가득했다. 주관을 개입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하는 과학자로서 기철의 태도는 올바르지 않았지만 리처드 박사는 기철이야말로 자신이 느끼는 부채의식을 넘겨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박사의 짐작이 옳았던 것일까, 그가 제안을 건네기 전에 기철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비록 자신도 시술을 받았지만 더 이상 이 연구에 힘을 보태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실 사직서라고는 하나 그의 입장에서 퇴직은 부서 이동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리처드 박사는 본능적으로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프로젝트를 나와 기철과 함께 다른 연구를 시작했다. 인류에게 다시 시간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기철이 니시무라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니시무라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어야 했다. 그러나 기철은 어리고 여유가 없었으며 니시무라 본인조차도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물리적인 시간만 늦췄을 뿐, 인류가 자각하는 시간은 시술을 받기 전과 동일했던 것이다. 갑자기 주어진 엄청난 시간에 인류는 긴 겨울 방학을 맞이한 아이들처럼 무뎌졌다. 니시무라도 그랬다. 자기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대비하기 전에 흘러간, 또 다가올 세월의 중압감이 못 견디게 무거웠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과 다르게 그에게는 의지할 존재가 없었다. 시술이 탄생하기 전 부모를 잃었으며 평생 이성이라고는 사귀어본 적이 없는 외로움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창 밖으로 한줄기 선이 되어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처럼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머리를 가득 채웠다. 유진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 그녀가 없었다면 아마 기철도 니시무라와 같은 길을 걷지 않았을까. 고개를 돌려 유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맑은 눈망울은 얼어붙은 시간 사이에서도 북극성처럼 빛나 기철이 길을 잃을 때면 다시금 세상과 마주할 용기를 주었다. 그러고 보니 유진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지난달이었던가, 아니면 작년 이맘때쯤이었던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침대에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분명 그런 식의 말을 했었다. 당신의 생기를 가득 담고 태어난 아이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겠지. 아이의 대부는 리처드 박사님이 맡아주셨으면 좋겠어. 기철도 그 답지 않게 신을 내며 한바탕 말을 쏟아냈었다. 상상만 해도 즐거운 기억에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유진도 기철의 미소를 보고서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서글픈 눈웃음을 지었다.


연인은 서로를 응시했다.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듯한 사랑스러운 연인을 담은 채 리무진은 계속 도로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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