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박사는 부랴부랴 짐을 정리했지만 사실 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연구 자료의 핵심이 든 USB, 캐주얼한 정장 두 세트, 여분의 속옷, 필기구와 안경, 지갑, 전화기가 들어있는 서류 가방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단출한 짐을 커다란 여행 가방에 쑤셔 넣은 박사는 한숨 돌린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PM 5 : 10
디지털시계의 검은 배경에 선명한 녹색광으로 시간이 표시된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 살아가는 이 시대 사람답지 않게 그는 항상 시간을 체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PM 5 : 11
숫자가 바뀌며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려준다. 불연속적인 변화에서 흐름을 유추하는 것은 인간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과 함께 시간도 잊어버렸다. 하루가 낮과 밤이 지나고 다시 낮이 찾아오는 것을 의미하던 시절과 다르게 시간은 그저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지표 정도가 되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박사는 검은색 정사각형 모양의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단말기 왼쪽에 자리한 버튼을 누르자 허공에 영상이 떠올랐다. '곧 도착 예정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집 주변의 지도와 원이 표시되어 있었다. 원은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박사가 부른 택시가 곧 도착할 참이었다. 잠시 쉴 시간도 없군. 박사는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린 뒤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던 박사는 이내 다가온 택시에 몸을 던지듯 실었다. 둥근 공처럼 생긴 택시는 박사를 태우고 천천히 굴러갔다. 느려터진 속도에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놈의 안전이 뭔지, 어차피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안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을 텐데. 그럴 거면 저 길바닥에 널브러진 마약 중독자들이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군. 박사는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동시에 부산스레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담배를 한대 태우고 싶어 상의 안쪽 주머니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렸지만 택시는 금연이었다. 아니, 이 세상 전부가 실내금연 딱지를 써붙이고 흡연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마약 중독자들이 세상이 순리대로 흐르던 시절을 기준으로, 치사량을 한껏 넘어서는 약물을 들이켜고 곳곳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있지만 여전히 흡연자에 대한 취급은 최악이었다. 하긴, 이 세상에 미쳐 돌아가는 것이 어디 저런 것뿐이겠는가. 이게 전부 그 시술 때문이었다.
박사가 자신의 과오를 알아차린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술이 이루어진지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당시 박사는 스스로 Dr.Lee와 함께 세상을 바꿀 선구자라 믿었다. 그들은 확실히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루어 인류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 발자국이 구덩이였음을 깨닫지 못했을 뿐, 그들에 의해 인류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과거와 이별을 고했다. 모두가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기대했건만 세상은 결국 이지경이 되었다.
그는 문득 그의 아들을 생각했다. 명석하고 생기가 넘치던 아들은 언제나 박사의 자랑이었다. 생물학자였던 아내를 닮아서인지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은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하며 WJTP(World Joint of Theoretical Physics)에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시간이 흐르며 박사의 품을 떠난 아들은 연구소가 위치한 매사추세츠로 떠났고, 여느 부모자식의 관계와 같이 그들도 어느새 소원한 관계가 되어있었다. 아들을 명절 때나 볼 수 있었던 박사는 아들을 기다리며 달력에 X자를 긋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 그즈음부터 시간을 자주 확인하는 습관이 들었던 것 같다.
문제는 지난 명절에 일어났다.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박사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가치관의 변화를 겪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만큼 그때의 일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담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불씨였다. 여느 때처럼 모여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안부를 묻고 오래된 영화를 보며 추억을 곱씹는 명절이었다. 특별히 대단할 것도 없는 그런 날, 박사는 아들이 더 이상 반갑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너무 오랜 세월을 보낸 탓인가, 매번 같은 명절음식도 지겹게 느껴졌고 대사를 외울 정도로 본 영화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짜증이 났다. 옆에서 멀뚱히 앉아 불룩하게 나온 배를 벅벅 긁어대는 저 낯선 남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지나치게 익숙한 풍경이 그날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꿈속에서 겪은 현상을 현실에서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기묘한 기시감과 평행을 이루며 날아드는 괴리감. 이 혼란스러운 감각은 아들이 떠난 후에도 계속 박사를 괴롭혔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렇겠지. 아니, 너무 많이 봐서 그렇겠지. 스스로 생각해도 모순임을 알지만 억지로 납득하려 했다. 그러나 역설 사이에서 피어난 잔인한 현실은 그가 꿈꾸던 미래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와인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의 지적 능력도 성숙하길 바랐지만 결과는 잔뜩 쉬어버린 시큼한 포도였다. 원형을 가까스로 유지한 채 점점 본질에서 멀어지는 쓰레기. 그것이 박사가 마주한 진실된 세상이었다. 무한의 시간을 견디기에 인간의 정신은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비로소 깨달은 박사는 응당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도시 깊숙이 위치한 어느 슬럼가에 레지스탕스가 자주 회동을 가진다는 소문은 거리에 파다했다.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에 반발하며 조직되었다는 이 용감한 반란세력은 철저히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술소에 대한 테러나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달리즘의 주체가 레지스탕스일 것이라는 소문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던 박사도 들은 적이 있었다. 반란세력에까지 생각이 닿은 박사는 꾸준히 받아온 협박 메일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999+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는 메일의 파도가 박사를 반겼다. 이럴 거면 미리미리 정리를 할걸 그랬다. 아들과 과거의 인연들이 보낸 안부 메일, 연구소 직원들이 결재를 요청하는 메일도 있었지만 메일은 대부분 도박, 성인 사이트로 유도하는 스팸성 광고 메일이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구나. 그리고 어차피 죽지도 않는 세상에 안부는 물어서 뭐 하게? 연신 중얼거리며 삐딱한 태도로 메일을 넘기던 박사는 한 가지 눈에 띄는 메일을 발견했다.
'확인 요망'
당황스러울 정도로 간단한 제목에 내용은 더 터무니없었다.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기다릴 것이다.'
약 2년 전에 보내진 메일, 박사는 그 짧은 글에 사로잡혔다. 두꺼운 쿠션에 몸을 파묻으며 천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메일의 문구가 머리를 맴돌았다. 미래를 위하여. 멈춰버린 인류에게 아직도 미래를 기대하는 멍청이들이 있었다니. 게다가 영겁의 시간을 살아갈 인류에게 기다림이란 너무도 익숙한 것이다. 그럼에도 기다린다 하였다. 대체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머리가 바쁘게 회전했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본 첩보 영화가 떠올랐다. 본문은 온갖 스팸으로 도배하여 감시를 피해 메일 주소로 정보를 교환하는 주인공을 보고 한심하다 생각했었다. 이런 낡아빠진 방법을 누가 쓴다고.
오랜 시간 동안 잡히지 않은 전설 속 조직이 이런 허술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노출시킬 리 없다고 되뇌면서도 박사는 메일 주소를 확인했다. 산발적인 13개 숫자의 조합. 이를 복사하여 검색하자 하나의 좌표가 화면에 나타난다.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화면 속 장소를 캡처했다. 좌표는 동네의 슬럼가에 위치한 시장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