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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Nov 27. 2023

필멸의 방정식(4)

저항(2)

박사는 택시에 앉아 당시를 회상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접근이었다. 동시에 무모했다. 아무리 절실하다 하여도 자신이 한 일을 거부하는 집단에 단신으로 찾아갈 생각을 하다니. 비록 그가 구석에 몰려있어 앞뒤를 잴 여유가 없었다 하더라도 미친 짓이었다. 좌표를 찾은 뒤 무언가에 홀린 듯 박사는 대담하게 레지스탕스를 찾아갔다. 좌표는 그를 한 시장으로 이끌었다. 더럽고 지저분한 슬럼가에 위치한 시장은 초입부터 박사를 압도했다. 한 블록 밖에서도 느껴지는 정체 모를 악취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사람들이 그를 반겼다.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 쥐고 좌표를 적은 종이와 길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은 박사는 약에 취한 마약 중독자들이 모여 낄낄대고 있는 건물에 다다랐다.

"실례합니다. 말씀 좀 물을게요."


박사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한껏 어깨를 움츠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벌벌 떠는 박사를 보며 그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몇몇은 배를 움켜쥐고 웃다 계단에서 구르기도 했다. 다소곳한 박사의 모습이 그들에게는 한낱 웃음거리였다. 그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아저씨! 뭘 그렇게 겁먹고 그래요. 우리 그렇게 무서운 놈들 아닌데. 물론 시비 거는 놈들 머리에 구멍 한두 개씩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뭐 어때요! 어차피 죽지도 않는데. 센터 앞에 던져두고 가면 내일이면 다시 살아서 멀쩡히 이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온 피부를 문신으로 대체하기라도 한 듯 혓바닥까지 새파랗게 칠한 스킨헤드가 혀를 날름거리며 비열하게 말했다. 본인은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르는 모양이지만 외형만큼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박사는 그 모습에 구토감이 몰려왔다.


"멀쩡하지는 않지. 돌아온 놈들 모두 어디 하나씩 나사가 빠져있거든. 왜 저번에 그 대학생 놈들. 술 취했으면 곱게 집에 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괜히 와서 시비 걸다가 머리에 하나씩 예쁜 구멍 뚫어줬잖아. 돌아갈 때 보니까 다들 멍한 표정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가더구먼."


눈의 흰자까지 까맣게 칠한 녀석이 비아냥대며 말했다. 아마 그들은 음침한 뒷골목에 위치한 불법 시술 센터를 말하는 것이리라. 불법 시술 센터는 인간의 육체를 피규어쯤 정도로 생각하는 곳이다. 사고나 갱단끼리의 항쟁으로 잘려나간 자리에 방부처리한 더러운 살덩어리를 덕지덕지 바르는 식으로 운영하는 나사 빠진 녀석들이 득시글한 곳.


심지어 이들은 인간의 뇌도 취급한다. 당연히 뇌처럼 예민한 기관을 어린아이가 찰흙놀이를 하듯 주무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토록 미친 짓이 가능한 이유는 생명 연장 프로젝트의 핵심이 인간 세포의 자가 재생, 분열 능력을 비정상적으로 강화시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인간의 육체는, 특히 생명연장 시술 이후 제대로 된 케어를 받지 못한 저소득 저학력 계층의 육체는 찰흙 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박사는 그들의 저열한 비아냥거림에 속이 쓰렸지만 원하는 바가 있어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간 살아오며 얻은 처세술이 그가 맘대로 지껄이는 것을 막았다.


"문신 멋지네요. 혹시 이 근방에서 시술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무슨 시술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 주변에서 불법 시술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그래서 다들 조금씩 제정신이 아니라고. 조금씩이 아닐 수도 있고."


중독자 녀석들은 뭐가 웃기는지 다시금 자기들끼리 낄낄댔다. 박사는 더 이상 얻을 게 없을 듯하여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듯 다리를 떴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장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티끌만 한 단서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슬럼가의 밤은 위험하다. 살인자, 마약상, 갱단, 정키들이 난동을 부리는 탓에 경찰도 이 지역으로 순찰오기를 꺼려한다. 벌써 골목에서 피를 흘리며 떨어진 팔을 붙잡고 꿈틀대는 절단면에 비비대는 사람이 보인다.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지체하는 순간 이곳에 먹혀버리고 말 것이다.


박사는 치밀어 오르는 토사물을 억지로 삼키고 눈물을 닦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숨이 헐떡이고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러 옷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미로에 갇힌 듯 막막함이 몰려왔다. 문득 등골이 오싹해 뒤를 돌아보니 험악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미노타우로스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박사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자신의 경솔함을 원망하며 수백 년간 잊고 살아온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려는 순간 누군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리처드 박사?"


"예......?"


"리처드 박사 맞습니까?"


곰처럼 커다란 남자가 박사의 팔을 잡고 물었다. 거대한 팔뚝에 힘줄이 징그럽게 넘실거렸다. 박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남자는 박사를 이끌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박사는 두려웠지만 골목에 들어선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직업적인 관심에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방금 지나온 벽에는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두꺼운 쿠션을 갖춘 조종석처럼 생긴 소파도 있었다. 그리고 낯선 조형물이 잔뜩 매달린 모빌도 있었다. 영문 모를 조합이지만 이것들 덕분에 박사는 끌려가는 와중에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되찾았다. 무엇보다, 정면에 펼쳐진 이색적인 광경은 박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향수를 몰고 왔다.


남자가 박사를 끌고 간 곳은 시장의 음침한 골목 중에서도 빛 한 줌 들기 어려운 깊은 곳이었다. 끊어진 전선에서 지지직거리는 불똥과 불규칙적으로 점등하는 네온사인만이 길을 비출 뿐이었다. 박사는 이런 적나라한 공간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피복이 벗겨지고 살갗이 드러난 날것이 광경은 그에게 무척이나 어색한 것이었지만 이런 풍경은 그가 발을 내디딘 세계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았다. 남자는 이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앞에는 거대하고 짙은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그나마 시야를 밝히던 빛마저 빨아드려 마치 공간 자체가 멈춘 듯 보였다. 박사는 그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남자가 덩치에 어울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고 당신이 불러온 세계에 격렬히 저항합니다. 아마 우리 중에는 당신을 혐오하여 불법 시술소에 팔아버리려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남자의 정중하면서 어눌한, 하지만 위협적인 어투에 박사는 대답 대신 정면의 모습을 불편하게 응시했다. 청산하고픈 과거를 들고 사죄하러 제 발로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말에 박사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모든 연구자에게 연구물은 자식이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박사는 자신의 세계가 정면으로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스스로도 이토록 갑작스럽게 일을 벌일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연구자로서의 천성과 수백 년 동안 현실을 외면하며 살았던 탓에 극도로 소심해진 성격은 그를 더욱 깊은 곳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나 한번 지펴진 불꽃은 그를 나아가게 했다. 세상에 대한 속죄인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으나 안개가 끼인 듯 답답한 머릿속에 번지기 시작한 밝은 얼룩은 어느새 그의 우주를 뒤덮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랬다. 처음 겪은 역겨운 경험에도 그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호한 머릿속 그것은 분명 어떤 형태를 갖추려 하고 있었다.


그의 사고는 천천히 수렴하여 이내 하나의 대답을 이끌어냈다.


"아주 약간이지만."


그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느릿하게 말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소. 나는 원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오. 애초에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게 더 적당한 표현인 듯싶지만, 아무튼 세상에 진절머리가 났다는 정도로 생각하는 게 그쪽에게 편할 듯싶소. 이 미쳐버린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죄책감은 당연히 가지고 있네만, 내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겨우 그런 사소한 감정 때문이 아니오. 나도 이 기분을 정확히 정의 내릴 수는 없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이곳에 왔고, 나는 인간에게 다시 죽음을 되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오. 이제 그대가 대답해 주시오. 이 어둠 앞에서 떨리는 감정이 두려움인가 아니면 설렘인가? 그대가 내가 찾던 존재가 맞습니까?"


그리 빠르게 말하지도 않았건만 박사는 거친 호흡은 내쉬며 말을 마쳤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남자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당장 일을 시작하지요."


남자는 뒤를 돌으며 덧붙였다.


"아, 제 이름은 랜버본입니다. 동료들은 곰이라 부르지만 그 별명은 좋아하지 않으니 부선장이라 불러주시지요. 아니면 그냥 랜버본이라 부르셔도 되고요. 편하신 대로."


랜버본은 그를 지하로 이끌었다. 아니, 사실 지하인지 지상인지 박사로서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래로 한참을 내려가다 다시 위로, 옆으로 꺾었다가 다시 직진. 박사는 이 거대한 남자가 과연 길을 기억하기는 할까 하는 의문을 품으며 그의 뒤를 쫓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한 발걸음으로 이동하는 랜버본을 쫓다 보니 박사의 몸은 땀으로 푹 절고 말았다. 처음에는 박사도 길을 기억하려 애썼다. 어떤 방식으로 연락을 취할지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언젠가 이곳에 돌아올 일이 생길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갈림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항복을 선언하며 주저앉았다.


"잠깐만 쉬었다 가면 안 되겠습니까. 도저히 쫓아갈 수 없어요!"


결국 박사는 애원하듯 외치며 벽을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 시간을 세계에 머무르며 낡을 대로 낡은 몸뚱이와 정신은 도저히 박사가 통제할 수 없었다. 그도 젊을 때는 누구보다 정력적인 육체와 명민한 두뇌를 가지고 세계를 활보했다. 그 당시에는 세계가 마치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라도 하는 듯 걸음걸이에 힘이 있었고 시도하는 일마다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 성취감과 활력은 그의 강력한 아군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은 아군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에 가까웠다. 자신을 이 세계에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묶어놓는 잔인한 속박.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작은 성공과 전진에 만족하며 언젠가 나타날 꼭대기를 고대했지만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는 꼭대기는커녕 시커먼 먹구름만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는 시지프스조차 아니었다. 박사는 부조리한 세상에 묵묵히 반항하며 누군가의 질서를 하찮게 만들기보다 질서에 동조하여 부조리를 양산하는 제우스의 하수인 정도였던 것이다.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힘내서 따라오세요."


랜버본은 박사의 간절한 외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노인이 부탁하면 들어줄 법도 하건만 그에게는 세상의 윤리보다 더욱 중요한데 있는 듯했다. 하긴, 이 세상에 나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가. 박사는 포기하고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랜버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개를 푹 숙이고 관성적으로 움직이던 박사는 이내 거대한 벽에 부딪히며 뒤로 넘어졌다. 엉덩이를 문지르며 위를 올려다보자 랜버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덩치였다.


"도착했습니다. 이 문 앞에 박사님이 원하는 해답이 있을 겁니다."


랜버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박사의 눈앞에는 거대한 철문이 있었다. 음침한 조명에 어울리는 낡고 녹슨 철문, 사물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소리 내어 삼켰다. 끈적한 침이 먼지로 가득한 먼지로 인해 거칠어진 목을 쓸어내리며 힘겹게 넘어갔다. 랜버본은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밝은 빛이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어둠에 오랜 시간 머무른 탓에 암순응이 되었는지 쉽게 눈을 뜨기 어려웠다. 그의 한심한 모습을 묵묵히 기다린 랜버본은 박사가 눈을 찡그리고 깜빡이는 것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눈을 뜨시지요. 그리고 마주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과연, 반란세력이 '새로운 세계'라 자부할 만한 공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실, 그 공간은 아름답고 정갈하게 짜인 별세계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상 혹은 지하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중 쓸만한 것을 그러모아 만들어진 마을은 아무리 봐도 조잡함을 숨길 수 없었다. 대충 판자와 합판의 부스러기로 구색만 갖춘 집들이 즐비해 있었고 마을 중앙을 흐르는 강물은 어딘가 찜찜한 부패의 냄새를 풍겼다. 그뿐인가,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입은 옷 또한 허름했다. 지상에서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옷을 제멋대로 주워다 입은 듯 하나같이 남루하고 옹색한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박사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이 희망이 시작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었다. 지상에서 아주 오래전 사라져 버린 처연하고 필사적인 표정. 생의 감각이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오기에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생생한 모습들이 이 마을에는 어디에나 있었다. 어디서 끌어온 것인지 밝고 청량한 달빛이 은은한 조명들과 어울려 거대한 공동을 비추었고 그 빛무리에 휩싸인 사람들과 건물이 아름답게 발광했다. 심지어 은근한 하수구의 냄새를 풍기는 물길조차 그들의 생기에 감화된 듯 청량해 보였다.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곳은.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만 다들 만족하며 필사적으로 살고 있지요. 밖의 사람들과는 다르게요."


랜버본의 말에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비록 문명의 혜택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한정된 생명을 살아가는 자들이지만 그렇기에 이곳에는 생명이 있었다. 밖에서는 볼 수 없는 너무나 찬란하게 불타는 그 생명이 박사의 몸에 옮겨 붙었다. 박사는 다시 젊어진 것처럼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열띤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찾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오! 생명을 진지하게 대하는 모습, 그래!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생명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죽음을 정복했죠.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군요. 그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어째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없애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음에도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없는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인간은 그저 인간입니다. 더 나아질 수 없는 완결성을 가진 존재로 태어난 것이지요. 그런 인간이 그나마 패러다임에 저항하고 처절하게 성장을 갈망한 것은 죽음이라는 녀석이 언제나 목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었습니다. 인간은 생을 유지하려는 욕구로 인해 발전해 온 동물이라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에 합의된 명제니까요. 그렇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생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너무나 무겁기에, 그리고 이는 질서에 파문을 불러오기에 우리는 눈이 먼 채로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그대들의 모습을 보니 이제야 명확히 알겠습니다. 나는 인간에게 생명을 앗아간 것입니다!"


박사의 흥분은 이내 절규가 되어 공동을 가득 메웠다. 지나가는 사람들, 건물 안에서 밤을 맞이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박사는 사죄하는 듯 무릎을 꿇고 계속 신을 찾았다. 그래 신, 박사는 어느새부턴가 신도 잊고 있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시술을 받고 오랜 시간이 지나며 지금까지 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신 또한 그를 찾지 않았다. 신은 더 이상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현재 인류에게 신은 거추장스럽고 유치한 옛 시대의 유물일 뿐이었다. 그때 인파를 헤치고 절규하는 박사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 사람은 랜버본이 그랬던 것처럼 박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밤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지요. 태초에 자연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는 모두가 밤에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기로 합의했습니다. 물론 합의서를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자의 말에 랜버본을 비롯해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랜 시간 표정을 짓지 않아서인지 박사는 입꼬리만 겨우 씰룩일 뿐이었다. 농담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웃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야속한 얼굴 근육은 그저 움찔댈 뿐이었다.


"굳이 웃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요. 마모된 마음은 밤이 치유해 줄 것입니다. 기력이 쇠한 육체는 낮의 햇빛이 채워줄 것입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말했듯이 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낮에 열심히 일을 했기에 밤에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박사님이 그렇게 난동을 부리면 저희가 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쉬시지요."


후드를 쓴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다시 박사를 바라보며 후드를 내렸다. 그 안에는 생기 넘치는 갈색의 피부, 총기가 흐르는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부스스하게 뻗친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제 소개를 빼먹었네요. 저는 이 마을의 촌장인 바티스입니다. 선장이라 부르셔도 되고, 촌장이라 부르셔도 됩니다. 편하신 대로 부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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