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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Nov 29. 2023

필멸의 방정식(5)

단서(1)

기철은 리처드 박사를 애타게 찾았다. 항상 가장 먼저 연구실에 출근하여 낡은 태블릿을 들고 중얼거리며 방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었는데, 며칠 전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보다 많은 시간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갇혀 살아온 박사이기에 가끔 제정신이 아닐 때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어 걱정을 하던 참이었다. 과거에 그는 누구보다 학문에 열정적이고 인간을 걱정하는 철학자였다. 기철은 그런 박사의 변화가 못내 안타까웠다.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이끌어주고 평생의 반려자를 소개해준 은사인 리처드 박사가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는 망령처럼 변해가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으니까.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관성적으로 연구를 계속하던 박사는 그야말로 기계였다. 미친 듯이 몰두하여 무언가를 휘갈겨 쓰다가 갑자기 방전된 로봇처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던 박사는 어느 연차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박사가 사라진 현재 시점에서도 처음에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집에서 푹 쉬다 돌아와 다시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연구를 계속하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박사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연구실은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


기철은 자신의 은사인 리처드 박사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리처드 박사가 그동안 현실을 어떻게 무시하고 무감각한 채 살아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음과 불안이 점점 커져가며 가슴을 채웠다. 게다가 니시무라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 더해져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기철은 리처드 박사를 찾기 위해 연구실을 돌며 동료들에게 박사의 최근 행적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리처드 박사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행정 지원팀에서 일하는 수빈에게 박사의 근무 기록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지만 장기간의 휴가를 냈다는 이야기 밖에 듣지 못했다. 기철이 아는 한 박사는 장기간 휴가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휴가를 쓰라고 떠밀어도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연구를 계속할 사람이었다. 관성적으로든 아니든 말이다.


기철은 연구소의 카페에 앉아 박사가 잠적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최근 그의 행적을 돌이켜보며 무언가 놓친 부분은 없는지, 이상한 점은 없는지 점검했다. 그러다 문득 박사가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순간이 뇌리를 스쳤다. 그날, 박사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지각을 했다. 땀에 푹 절어 엉망이 된 셔츠를 입고 잔뜩 흐트러진 머리로 연구실에 출근해 미친 듯이 서류를 뒤적거리던 그날, 학부생 시절부터 박사를 봐온 기철에게도 박사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기억에 남았다. 비록 박사의 행색은 엉망이었지만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점차 삶의 의미를 잃고 기계가 되어가던 그에게 어찌하여 그런 생의 빛나는 감각이 보였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그는 그날 이후 달라졌다. 연차를 내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으며 돌아올 때마다 숨을 헐떡거리며 곧 죽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이전에 발견할 수 없었던 생기가 흘러넘쳤다. 그래, 크리스마스에 바라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말이다.


아마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가 몰랐던 현실의 날카로운 단면 나타났고, 그 모든 것이 신비로움과 암울함을 품고 있었다. 사실, 기철은 박사가 자신의 연구에 회의를 느끼고 일종의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연구에 몰두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고통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기철은 그런 박사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과거의 흔적을 돌이켜보던 중, 문득 니시무라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시 과거로 돌아가면 시술을 받을 거야?'


'아니,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저 도로 건너 마약 중독자들 이 모여사는 곳 있잖아. 거기에 저항군이 있대.'


'저항군? 뭐에 대한 저항을 하는데?'


'수명 연장 프로젝트에 대한 저항,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한 저항.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경건히 받아들이자는 목표로 활동한다던데. 요즘 연구소에 소문이 자자해. 너나 나나 프로젝트에 참여한 주제에 시술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잖아? 그런 사람들을 노려서 저항군으로 편입시킨대.'


당시에는 과학자라는 녀석이 도시전설 같은 것을 믿냐며 니시무라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저항군이라는 자들이 박사의 잠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박사가 언젠가 자신에게 메일함에서 원하는 메일을 찾아낼 수 있는 알고리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전문 분야가 아니기에 모른다며 흘려들었었는데, 아귀가 들어맞는 기분이다. 기철은 점점 불안과 두려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리처드 박사는 그동안 기철의 멘토이자 친한 동료였기 때문에, 그의 결백한 존재가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불안한 심정은 기철의 마음을 괴롭히고,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박사는 저항군을 찾아 나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하는가. 사실 기철 자신도 알고는 있었다.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해 불현듯 찾아오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채색의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을 보면 걷잡을 수 없는 짜증과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을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순환을 대가로 현재만을 얻어버린 세계에서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니시무라를 따라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럴 용기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세월이 흘러 빛바랜 추억이 되어버린 과거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기철의 부모님은 아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세대의 인류처럼 나이 들고 죽어가기를 원했다. 당시에는 그들이 남득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완전히 납득할 수는 없지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감각에 휩싸인 이후 적어도 그들이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이해는 되었다. 머리로는.


아무튼 기철은 현재 선택의 기로에 서있었다. 현재 그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시도라도 해 볼 것인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지만 기철은 혼자 몸이 달아 방 안을 정신없이 돌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연인에게까지 생각이 닿았다. 이렇게 고민해서 뭐 하나, 결국 유진을 두고 혼자 선택할 수 없는 것을.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한 나머지 둘은 가족, 연인을 넘어 마치 한 몸처럼 영혼을 공유하는 듯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의 고민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 갑자기 유진이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그녀 옆에 있을 때만이 잠깐의 안식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전화기를 집어든 순간, 문자가 왔다. 유진이었다.


'오늘 집에 일찍 왔으면 해. 할 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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