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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02. 2023

필멸의 방정식(6)

단서(2)

기철은 현관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주저하며 습관적으로 목을 매만졌다. 오른손을 들어 왼쪽 목부터 시작하여 목울대를 지나 오른쪽 목까지. 잘난 척하는 듯한 그의 꼴사나운 행위는 유진을 만나면서부터 하게 된 행동이었다. 유진은 퇴근하는 기철을 맞으며 으레 그의 목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오늘 어땠어?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이야기해 줘.'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뒤에서 기철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면 감전이 된 것처럼 온몸에 전류가 흐르고 발끝부터 온몸이 서서히 따스해진다. 유진은 그런 기철의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고는 먹이를 노리는 고양이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에 올라탔다. 수없이 반복된 연인만의 루틴이지만 그 순간만큼 살아있음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 루틴 덕분에 혼자 있을 때에도 목을 매만지며 긴장을 푸는 습관이 생겼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연인과 함께하는 공간이건만, 지금은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나 싫었다. 유진은 무언가 불만이 있을 때 항상 할 말이 있다며 그를 책상 앞에 앉히고는 했다. 그리고 잔소리가 쏟아진다. 사실 그녀의 잔소리는 그리 대단할 것이 없었다. 그저 오줌은 앉아서 싸라는 등, 양말은 뒤집어서 벗지 말라는 등 하는 생활 속에서 동거인끼리 나눌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자들의, 그리고 연구에 파묻혀 사는 연구자들의 천성이 무신경한 것을 어쩌겠는가.


기철은 유진이 또 어떤 이유로 화가 났는지 자신의 행적을 돌이켜보며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나 왔어."


그녀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현관에서 반갑게 맞이하며 그를 가볍게 안아주었을 텐데,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다.


"화났어?"


유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동시에 곱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앞에 앉으라는 듯 탁자를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일찍 오라 하고. 그런 적 없었잖아."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기철 씨. 잠시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 나는 당신처럼 책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논리적으로 말하려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웬만하면 당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당신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 잠시만, 아주 잠시만 시간을 줘. 최대한 각색하지 않고 말해줄게."


그녀의 말에 묘한 가시가 느껴졌다.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눈치를 힐끗 살피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기철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그는 속으로 맹렬하게 과거의 행적을 더듬고 있었다. 하지만 얼핏 생각나는 것만 수십 가지에, 수백 년 치 기억의 파도가 물밀듯 밀려와 곧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오늘... 퇴근하면서 우연히 문틈에 낀 편지를 봤어. 조금 당황스러웠지. 요즘 종이로 편지를 전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처음에는 그저 장난이나 스팸이라고 생각했어. 행운의 편지 같은 거 말이야. 하지만 손에 쥔 종이의 질감이 너무나 어색하고 약간은 기쁘게 느껴져 쉽게 놓을 수 없었어. 수백 년 전,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생물이었을 때의 감정이 몰아친 거야. 그래서 여기 앉아서 한참을 만지작거렸어."


기철은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생각을 정리한 것 치고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황홀함을 추구하는 사람. 그녀의 화법에는 익숙했다. 기철은 조용히 물을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고마워. 이어서 이야기할게. 종이, 그러니까 그 편지봉투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어. 어떻게 편지인지 알았냐는 말은 하지 마. 누가 봐도 편지봉투처럼 생겼으니까. 아무튼 표면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쓸어보아도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어. 누가 보냈는지, 누구에게 보낸 건지도 말이야. 나에게 온 편지일 수도 있지만 당신에게 온 편지일 수도 있잖아. 그래서 가만히 내버려 뒀어. 탁자 위에 두고 신경 끄려고 했어."


그녀는 이어질 말에 죄책감을 담으려는 것인지 표정을 한층 더 어둡게 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지만 참을 수가 없더라. 알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건 뭐든지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거."


알고 있다. 유진은 예전부터 그랬다. 벌에 쏘이면 아프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말벌을 잡아다 손에 올려놓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래서 편지를 열어봤어. 내 천성 뒤에 숨는 게 비겁하다는 것은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 편지를 열면서도 끝없이 자기 합리화를 했지. 친구들이 장난친 거라고 확신했어. 과학자나 철학자처럼 진지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가득한 당신 친구들이 이런 장난을 칠리 없으니 내 친구들이 분명하다고."


기분 나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실제로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복잡한 수학 공식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거나 술자리에서 인간의 조건과 세계의 구성에 대해 토론하는 등 어딘가 나사 빠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절친한 친구, 니시무라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편지에는 별다른 말이 적혀있지 않았어. 그냥 인사말인 것 같았지. 처음에는 말이야."


그녀는 편지봉투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세월에 삭아버린 낡은 색감의 봉투는 스스로 골동품이라고 주장하듯 거칠거칠한 표면을 뽐냈다. 과연, 예민한 감성을 지닌 유진이 생각에 잠기기 충분했다.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내자 그녀의 말대로 편지에는 간단한 인사말 하나만 적혀있었다.


HI I'M URANUS


"안녕 나는 우라노스야...?"


"사실 조금 기뻤어. 종이를 구하기도 힘든 시대에 이런 정성스러운 장난이라니.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지. 무언가 숨겨진 게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떠서 이리저리 시험도 해봤어. 왜, 옛날 영화에 나오는 고전적인 트릭 같은 거 있잖아. 레몬즙으로 글씨를 쓰며 불을 가져다 대기 전에 보이지 않는다는 거. 그런 방법도 생각나서 시도해 보았어. 하지만 딱히 숨겨진 비밀은 없더라."


즐거운 한때를 보냈음에도 유진의 표정이 어둡다는 건 무언가 발견한 게 틀림없다. 예전부터 그녀는 기철보다 통찰력과 직관력이 뛰어나 복잡한 암호도 순식간에 풀어내고는 했다. 반면 기철은 아무리 쉽더라도 암호를 해독하는 능력은 형편없었다. 유진은 당시의 열띤 감정에서 비롯된 흥분을 억누르려는 듯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더라. 머리에서 불이 번쩍하며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 있잖아. 그런 느낌이 들면서 해독하는 방법이 생각났어. 애너그램! 그래, 이건 아주 간단한 말장난이었어."


애너그램, 말장난의 일동으로 특정 단어의 문자를 재배열하여 다른 뜻을 가지는 단어나 문장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부터 시작된 이 말장난은 히브리어, 라틴어, 영어를 막론하고 모든 언어에서 탄생하였으며 오컬트, 음모론을 신봉하는 사이비들이 주로 사용하던 수법이었다. 단어가 품고 있는 신비로움과 묘한 법칙들은 단순한 장난을 넘어 대중을 매료시켰으며 그들이 애너그램을 진정한 '신성한 말씀'으로 듣게 하였다.


Ave Maria, gratia plena. Dominux tecum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Virgo serena, pia, munda et immaculta

(거룩하고 신성하며 순수하고 순결한 동정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신비가 사라진 이성의 시대에도 애너그램은 매력적인 소재였다. 특히 글자를 다루는 작가들에게 말이다. 근현대 일본의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의 작품인 [1984]를 적절하게 비틀어 [1Q84]를 제목으로 차용했다. 아주 오래전 시대를 풍미한 영국 작가 J.K. 롤링도 자신의 대표작인 [해리포터]에서 애너그램으로 그 유명한 빌런인 볼드모트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유진과 기철도 자주 애너그램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늦은 밤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에게 퀴즈를 내는 식으로 말이다. 함께 어울리던 니시무라 또한 그들과 애너그램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유진에 가까운 통찰과 직관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언제나 마지막에 지는 것은 기철이었다. 니시무라를 생각하니 갑자기 울적해진다.


"아니, 잠깐... 니시무라?"


"당신답지 않게 금방 발견했네. 내 결론도 그거야. 니시무라."


그럴 리 없다. 니시무라의 죽음을 확인한 것도,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본 것도 기철, 자신이었다. 회의주의자들은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하겠지만 친구의 선택조차 의심의 대상으로 끼워 넣고 싶지는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슬펐지만 자살은 분명 니시무라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친구의 선택을 하찮은 거짓말로 만들고 있다. 황당함을 넘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난을."


"해독하고 나서 나도 화가 났어. 니시무라는 내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차근히 생각해 보니 단순한 장난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이야?"


"이 편지가 진짜 니시무라가 보냈을 수도 있다는 의미야. 생각해 봐. 이런 시답잖은 장난을 당신에게 누가 친다고? 물론 나에게 온 편지일 수도 있지. 사실 그 가능성이 더욱 높지만, 내 친구들이라면 자신을 드러내려 애쓸 거야. 봉투를 좀 더 화려하게 꾸민다거나 해서. 게다가 애너그램 같은 귀찮은 수단을 쓸 녀석들이 아니야. 의미 없는 인사말만 나열하고 말도 안 되는 퀴즈를 내거나 하겠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래. 내 생각에는 니시무라가 맞아."


유진은 한바탕 열변을 토한 뒤 숨을 돌리려는 듯 한숨을 내뱉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절실하게 담배 생각이 났다. 생명의 굴레에서 벗어난 뒤로 술, 담배 같은 유독성 물질이 더 이상 인간을 위협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집에서 담배를 태우지 못하게 했다. 매캐한 연기가 맡기 싫고,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이 약에 절어사는 중독자 같아서 보기 흉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철은 차마 담배를 피우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괜스레 담뱃갑만 만지작거렸다.


머리로는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기철 또한 유진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녀의 열렬함에 감화된 것은 아니었다. 명색이 학자인 기철이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한 말에 설득당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편지에 적힌 짧은 문장에 나타나는 근거들이 그로 하여금 이 편지는 진짜 니시무라에게서 왔음을 믿도록 종용했다.


기철은 정성스럽게 눌러쓴 글자의 끝자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많은 세월을 함께하며 그는 니시무라의 독특한 필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요즘 사람답지 않게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보다 종이에 펜으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일본계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자를 영문자보다 먼저 익힌 니시무라는 그 때문인지 모든 문자를 시작에 힘을 주고 끝에 흘려 쓰는 방식으로 적었다. 그래, 편지에 적힌 것처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유진이 상념에 잠긴 기철을 깨웠다. 기철은 유진이 마시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싸우자는 건 아닌데, 내 상식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당신 말대로 모든 증거가 이 편지의 발신인이 니시무라라고 말하고 있어. 내 머리도 그게 맞다 하고. 하지만 니시무라가 살아있다는 건 말이 안 돼. 죽은 니시무라를 이 손으로 안았단 말이야.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을 내 손으로 끌어안고 오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생명을 영원히 지속하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되돌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해. 윤리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살아있다고 한 적은 없는데?"


"뭐?"


유진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기철의 말을 끊었다. 저 표정은 그녀가 무언가 위험한 결심을 내렸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기철은 불길한 예감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살아있건 죽어있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편지는 살아있을 때 작성하고 사후에 보내질 수도 있는 거잖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알아보자고. 니시무라가 왜 이 편지를 보냈는지, 그리고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건 니시무라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야. 그에게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남겨진 사람에게는 그 선택의 이유를 밝혀내야 할 의무가 있어. 게다가 리처드 박사님."


그녀는 흥분이 되는지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리처드 박사님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니시무라와 관련이 있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어."


"터무니없는 소리."


"말도 안 된다는 거 알아. 당신이 좋아하는 명확한 근거도 없이 이렇게 말하는 거, 떼쓴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왜 당신 주변에서 자꾸 사람들이 떠나가는지? 이대로면 나까지 사라질지도 모르겠네."


기철은 유진의 말에 섬뜩함을 느끼며 가슴께에 손을 갖다 댔다. 유진은 기철이 애써 부정하던 가설을 천진한 얼굴로 언급했다. 니시무라도, 리처드 박사도, 그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 전부가 그에게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다. 우연의 일치라고 넘기기에는 그들 모두 자신과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 어떻게 하고 싶은데?"


기철의 말을 승낙으로 여겼는지 유진이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우선 나는 이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볼게. CCTV를 돌려보거나 종이의 출처를 알아보면 될 거야. 그쪽 분야에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나는 어떻게 할까?"


"당신은... 음..."


유진은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이내 결정을 내렸다.


"당신은 평소처럼 출근해. 그리고 박사님의 행방을 알아봐 줘."


기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수께끼를 해결하는데 재능이 없었다. 이런 일은 유진에게 맡기는 게 상책이다. 유진은 기철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심해. 가급적 상부에는 들키지 않도록 하고. 저번 파티에서 들었어. 당신네 연구소가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려 한대. 정부도 끼어있는 것 같고. 박사를 찾다 보면 위험해질지도 몰라."


"당신도 조심해."


유진은 그렇게 말하고 기철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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