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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03. 2023

필멸의 방정식(7)

덜 마른 유화에 물감을 덧칠한 것처럼 시야가 혼탁하고 무겁다. 구역질이 치미는 듯한 어지러움과 황홀함이 야릇하게 공존한다. 사이키델릭 한 색감이 온 세상을 물들인다. 물과 기름이 만들어내는 마블링이 환상적인 불확실함을 연주한다. 점도 있고 무겁게 움직이던 감각이 돌연 불타오르며 폭발한다. 분명 지하였는데, 두 눈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어와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청각이 예민해져 아주 작은 소리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내가 몸부림치며 내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신음소리는 불규칙적인 곡선 그래프가 되었고, 전등이 지지직거리는 소리는 폭죽처럼 눈앞에서 화려하게 터진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 올리자 짙은 회색 벽에서 곰팡이 같은 맛이 난다.

갑자기 땅이 꺼졌다. 어딘가로 한없이 추락한다. 주변이 온통 형광색의 물감으로 가득하다. 물감이 빙글 돌다가 물결치며 다가온다.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딸기맛이다. 순간 몸이 멈추고 무중력 공간에 들어선다. 이 공간에서 나는 그 무엇보다 자유롭다.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의 흐름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으며 침대 없이도 너무나 편하게 잠에 들 수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으로 몇 시간은 지난 듯 하지만. 시간 감각이 흐려져 알 수가 없다. 순간 날이 선 듯 감각이 예민해지고 명확해졌다. 나의 확장된 육체를 뇌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육체도 뇌의 지시를 잘 따라준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일치감이다. 기분이 최고조에 이르다 못해 전능함까지 느껴진다.


갑자기 벽에서 느린 속도로 공이 날아온다. 맞아도 상관없을 만한 속도였지만,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옆으로 살짝 피한다. 날아간 공이 반대쪽 벽에 부딪히자 엄청난 규모의 폭죽이 터진다.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간담이 서늘해지며 영문을 알 수 없는 오한이 몸을 감싼다. 엄청난 수의 공이 방을 가득 채운다. 집중하면 피할 수 있는 속도와 양이었기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전부 피해냈다. 방 안은 온통 폭죽으로 가득 찼다. 너무나 오싹하지만 동시에 황홀한 아름다움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러다 불현듯 이 공을 맞으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벽에서 아까 전보다 아주 조금 빠른 속도로 공이 날아왔다. 나는 이 공을 피하지 않고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손에서부터 폭죽이 터진다. 손, 팔, 어깨, 승모, 목덜미까지 화려한 붉은색의 꽃이 꽃잎을 날리며 탱고를 춘다. 입가에 하바네로 소스가 묻은 듯 강렬한 매운맛이 느껴진다. 자극적이고 격정적인 사랑이 눈앞에 선명하다. 더 세게 끌어안고 싶어 두 팔을 뻗어보지만 어느새 붉은 꽃으로 화해 자취를 감추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온몸을 던져 나의 감정을 물어본다. 온몸이 감동으로 불타오른다. 의식이 흐려진다. 시야가 높아졌다 낮아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 공을 끌어안은 채 사랑에 빠진 얼굴로 편안하게 잠에 들었다.


[3 xxx 년 11월 oo일 제24차 실험보고서]


1) 실험 목적


약물이 강화 신체를 통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약물을 조합하여 실험체에 주입하고 그 작동 원리와 경과를 이해한다.


2) 실험 원리


1. 경구 투여

2. 정맥, 근육, 척수 주위 공간, 피하로 주사하여 투여

3. 혀 밑 또는 잇몸과 볼 점막에 투여

4. 직장 또는 생식기 내 삽입

5. 안구, 비강, 귀를 통해 흡입 및 분무와 삽입

6. 패치와 연고 형태로 투여


이상의 방법 중 하나를 실험체에게 가장 적합한 투여방식으로 선정한다. 이전의 실험 결과를 참고하여, 강화신체의 특성상 신경망의 손상이 크기에 약효가 천천히 나타나는 1, 6 등의 방법을 제외한 직접 투약 방식으로 진행한다.


  마약성 약물과 확장 신체의 신경 침식을 막아줄 수 있는 임시 신경 차단 약물(디뉴로-3)을 조합하여 투약할 것이다. 이는 육체 확장자를 일시적인 환각 상태로 이끌어 신경에 의도적인 혼란을 가져옴과 동시에 신경을 차단하여 자신의 육체 감각을 인지회로에 새겨 넣을 수 있도록 한다.


3) 실험 도구 및 실험 방법

- 실험 도구

정맥 및 피하 조직에 직접 투약을 위한 주사기

LSD를 포함한 마약성 약물과 디뉴로-3

실험체를 관찰할 수 있는 밀실(대핵 방공호 기준으로 설계)

실험을 위한 총기 및 탄약


-실험 방법

1. 조합 약물 주사 후 반응이 나타날 때까지 대기(약 1분 소요)

2. 반응이 나타나면 경과 관찰

3. 초기 발작 가라앉으면 반사신경 테스트를 위해 총기 발사 실험


.

.

.

실험체가 과도한 인지 확장으로 주변 사물과 탄약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며 폭사.


[실험 실패]


"지금 이걸 보고서라고 들고 온 겁니까?"


은색의 무테안경을 쓴 여자가 부하로 보이는 듯한 직원을 노려보았다. 부하 직원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파묻은 채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이었다.


"죄송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실험이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무려 24차입니다. 24번이나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진척이 있기는 한 겁니까?"


"예, 확장 및 강화 신체를 인지할 수 있도록 약물을 사용하면 인지 영역이 과도하게 확장하여 도파민이 과분비됩니다. 이에 따라 주변에 대한 애착, 집착이 심해집니다. 이번 실험 같은 경우 이전의 실험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지만 발사되는 총알과 폭발하는 자신의 육체에 집착하게 되어 벌어진 일종의 사고입니다."


상사로 보이는 여자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안경을 벗고 미간을 손가락을 짚었다.


"어쨌든 실패했다는 거 아닙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점차 결과가 나오고 있으니 잠시 기다려주시면......"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제대로 된 결과를 가져오세요!"


상사의 폭발에 부하직원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듯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씨근대며 자리에 앉아 부하들의 무능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부하 직원들은 자신은 엿 먹이려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연구원이었던 시절 연구소의 실험실은 이렇지 않았다. 당시 그들에게는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다. 전쟁과 기아, 과밀화로 고통받는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그들은 인간에게 생명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요즘 애들이란."


프로젝트의 시행 이후 나이란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한 것이 되어 모두가 나이를 잊고 지낸다지만, 프로젝트를 이끈 그녀에게 세월의 흐름은 유독 야속하게 다가왔다.


"리처드가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으려나..."


그녀는 펜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그들은 죽음을 정복한 것도 모자라 인간의 육체를 강화시키려 했다. 성과는 있었다. 의수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해 '확장 신체'라는 개념의 정립하였고, 이를 인간이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뇌'까지 만들어냈다. 그와 동료들은 언제나 성과를 냈으며 세계의 어느 기업과 국가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명 연장 프로젝트'의 성과로 연구소의 헤드에 올라 더 이상 현장에서 뛰지 않아도 되는 위치가 되었다. 책상 위 명패에 멋들어지게 음각으로 새겨진 'Cade lab'이 눈에 띄었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편했지만 그녀는 언젠가부터 계속 화가 나고 불편했다. 푹신한 이 의자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듯하여 불쾌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과거의 영광에 빠져 허우적대는 늙은이라고. 명확한 사실만 말하자면 그는 늙은이라 불릴 정도로 노망이 났거나 노쇠하지 않았으며, 과거의 자신에게 취해있는 나르시시스트도 아니었다. 그저 마지막으로 자신을 불사를 공간을 찾고 있을 뿐이었다.


"Dr. Lee,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부하직원이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파란 작업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자재관리 쪽 사람인 듯했다.


"뭡니까."


자신을 어려워하는 그 모습에 괜히 심술이 났지만 그녀는 모른 척하며 서류를 검토하는 척을 했다. 그는 지저분한 오물이 가득 묻은 작업화를 털지도 않고 사무실에 발을 들였다. 순간 짜증이 솟구쳐 쏘아붙힐까 했지만 오늘을 더 이상 실랑이를 할 여력이 없었다.


"저... 자재가 부족합니다."


생긴 것도 어리바리해 보이더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네. 그녀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어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그녀의 마른세수를 보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자재관리 직원은 지레 겁을 먹고 움푹 들어간 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우리 연구소에 부족하다는 말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부족하긴 합니다. 앞으로 실험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럼 찾아봐야 할 거 아닙니까!"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대체 이 연구소는 내가 없으면 돌아가기는 하는 겁니까?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자재가 없으면 누락된 부분이 있나 찾아보고, 그래도 없으면 정부나 기업에 가서 요청할 생각을 해야지. 왜 나에게 그런 사소한 것까지 물어보는 겁니까!"


직원은 그녀의 호통에 큰 몸을 엎드려며 벌벌 떨었다. 애처로운 모습에도 그녀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 기회에 부하들의 정신머리를 고쳐놔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기업에 요청해 봤어요?"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는?"


"정부에도요..."


말꼬리를 흐리는 그의 모습에 짜증이 더욱 솟구친 그녀는 결국 들고 있던 펜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 이유가 뭐요. 당신이 맡은 일이 자재관리면 맡은 바 일을 똑바로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라고 돈을 주는 건데, 자꾸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나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겁니다."


"뭐라고?"


"그 '자재'라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험체가 부족해서 더 이상 실험을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아뿔싸, 그녀는 머리를 짚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험체가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연구소는 원활한 실험을 위해 기업과 정부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인간의 수명을 무한에 가깝게 만든다는 획기적인 기획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단체는 차고 넘쳤기에 실험과 연구소 운영에 필요한 자본이 부족한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는.


연구소가 약속받은 지원에는 단순히 자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동물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를 위해 연구소에서는 인체실험을 필수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인구가 차고 넘친다 하더라도 자국의 국민을 연구소에 팔아넘길 정부는 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제3세계 빈민국의 부패한 정부에서나 거액의 돈을 쥐어주고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국제법으로 명백한 불법이기에 감시를 피해 장기간 화물칸에 실려오느라 다 죽어가는 실험체만 공수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쪽 손을 들어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몸속에 작은 벌레들이 기어 다니며 신경을 갉아먹는 듯했다. 머리가죽이 후끈거리며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간지러움이 밀려왔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리처드가 보이지 않았다. 리처드가 있을 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철두철미함과 집요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심해졌지만, 동료의 그런 괴팍함은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덕분에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래서, 나에게 실험체를 구해다 달라는 거지요?"


날 선 그녀의 물음에 직원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무능함을 어필했다. 그녀는 이 한심한 논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아무렇게나 휘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서 일 보세요."


직원은 땅에 머리가 닿을 듯 크게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에서 도망쳤다. 그가 나가면서 깨끗한 사무실 바닥에 기름때와 정체 모를 검붉은 오물이 묻었다. 그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여 일부러 하얀색으로 도배한 방이 오히려 그녀를 더욱 고독하고 괴롭게 만들었다. 회백색 대리석이 깔린 바닥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숨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하고 탁 걸렸다. 누군가 손을 뻗어 심장을 옥죄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가슴을 두들기며 의자를 젖혀 뒤로 누웠다.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Cade는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기관보다도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재력, 기술력, 가용할 수 있는 인력, 심지어 경비대라는 이름으로 꾸린 전력은 작은 나라 하나 정도는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벌써 수십 년째 연구소에서는 아무런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게 사람이라고, 인류를 구원해 주었건만 이제 와서 어깨에 힘 꽤나 주고 다니는 국가와 연구소에 자재를 대는 기업들이 연구소를 은근히 압박하고 있었다. 편의를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며 몇몇 국가에서는 연구소 지부에 퇴거 요청을 내리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황당하고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의자에 누워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깨달은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해답을 찾은 듯 기괴한 열망이 떠올랐다.


"Cade Lab 대표입니다. 올웨니 있습니까?"


Dr. Lee는 눈을 번뜩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곧 전화 반대편에서 회신이 왔다. 극도로 조심하며 예의를 차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럽게 전화를 다 주시고."


"소말리아에 아직 시술을 받지 않은 아이들이 많지요?"


"예, 인구가 너무 늘어 문제입니다. 저희 측에서도 대안을 내놓고는 있지만 도저히 통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녀는 상대방이 들을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쾌재를 부르며 손을 불끈 쥐었다. 펜이 순간적인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져 손에 생채기를 내었지만 그녀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희열 때문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피가 새하얀 책상 위로 뚝뚝 떨어지며 불길한 파문을 일으켰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올웨니에게 제안을 했다.


"그 고민,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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