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철은 출근하자마자 박사의 출근 기록을 뒤져보았다. 보안이 생명인 연구소에서 출입자 명부는 철저하게 관리하는 게 원칙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근무하며 느슨해진 그들의 근무 태도와 사람을 쉽게 갈아치우는 Cade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잘리지 않고 살아남은 기철의 집요함은 연구소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기에 출입자 관리 부서에 있는 동료에게 회유와 약간의 협박을 통해 명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출입자 명부는 방문객이 시설에 들어서자마자 자동으로 작성된다. 부지 내에 발을 들이면 시설 전부를 감시하는 수많은 CCTV와 보안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파악한다. 얼굴, 홍채, 체형, 보폭, 소지품, 심지어 체온과 심장 박동 같은 정밀한 정보까지 출입 관리 부서로 전송되는 것이다. 이후 전송된 정보를 토대로 인공지능은 직원과 외부자를 가려내고, 그중 의심스러운 행동과 신체에 이상 징후를 보이는 사람을 색출하는데 이들의 정보는 부지 곳곳에 위치한 경비대에 전송되어 중무장한 직원들이 출동하게 된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알아서도 안되고.
과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Cade를 노리는 침투 시도는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았다. Cade와 기술 제휴를 맺을 여력이 되지 않는 영세한 국가나 기업 입장에서 세계 질서에 편입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으나 그러한 시도는 Cade와 그들의 뒤를 봐주는 단체들의 경계심만 키울 뿐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 장치들이 늘어나 지금의 꼴이 되었다. 기철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방 안의 CCTV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동료가 건네준 파일을 훑어보았다. 유진은 그에게 조심하라 했지만 천성이 연구자에, 소심하기 그지없는 그에게 이런 산업 스파이 같은 짓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책상 아래로 양손을 내리고 서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재의 행동으로 인해 받을 미래의 처벌이 자꾸 떠올라 손이 더욱 차가워졌다. 만약 그의 행동이 보안 부서에 알려진다면 5분 안에 이 방으로 중무장한 경비대가 쳐들어와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눌 것이다.
열을 내려 필사적으로 손을 비볐지만 그 순간만 따뜻해질 뿐, 이미 그의 피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마 이러한 그의 행동 또한 분석되고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기철이 시설로 들어와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전부 그가 초기 인사 중 한 명이라 보안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특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방에도 CCTV가 있는 만큼 최소한의 정보는 출입 관리 부서로 전송되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문득 스파이처럼 긴 트렌치코트를 입고 짙은 선글라스를 쓴 채로 벽 뒤에 몸을 숨기는 유진이 떠오른다. 유진이라면 자신처럼 겁을 집어먹지 않고 잔뜩 신이 나 스파이 영화에 나오는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화장실로 숨어들어 파일을 어딘가에 숨길 것이다. 친화력이 좋으니 순식간에 친구를 만들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정보를 빼돌리고 안전하게 탈출할 수도 있겠지. 아니, 어쩌면 그 강철 같은 Dr. Lee 마저 구워삶아 당당하게 정보를 얻어올지도 모른다. 활극을 펼치는 그녀를 상상하니 떨리던 손이 조금 진정되고 경직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기철은 자신의 뺨을 두 손으로 세게 친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는 혈관 곳곳에 퍼지는 담배를 느끼며 긴장이 서서히 풀려감을 느꼈다.
담배연기가 구름처럼 천장에 맺혔다. 짙은 연기에 의해 천장 한 구석에 달린 CCTV가 가려지자 그는 감시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자유로움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Cade의 보안이 겨우 담배 연기에 의해 가려질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시야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기철은 담배를 끄지 않고 재떨이에 걸쳐둔 채 다시 파일을 읽었다. 파일은 종이로 된 두꺼운 서류뭉치였다.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을 테지만 현재 보고 있는 부분을 실시간으로 감시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8월 25일 근무지 외 출장, 사유 : 자료 조사, 목적지 : 제3 상업지구.]
한참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이상한 정보가 잡혔다. 제3 상업지구라면 슬럼화되어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잊은 채 흉물스럽게 변해 도시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골칫덩이였다. 과거 백화점과 명품샵이 즐비했던 제3 상업지구는 그 영광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가격대의 차에서 내려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가게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던 이 거리는 이제 마약 중독자와 갱단,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연명하는 사람들의 터전이 되었다. 그리고 슬럼가가 으레 그렇듯 제3 상업지구 또한 법망을 피해 범죄를 일삼는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위험한 곳이었다. 기철이 아는 한, 박사는 그런 곳에 갈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그가 이 지구에 보이는 감정은 혐오에 가까웠다.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제3 상업지구는 국가 최대의 상업 특화 도시가 되어 전 세계의 자본이 모이는 명소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국가와 땅과 건물을 가진 자들이 Cade와 척을 지게 되며 문제가 생겼다. 생명 연장 프로젝트가 대중에게 확대되기 전, 시술을 받으려 돈을 싸들고 찾아온 그들에게 Cade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앞으로 전 국민이 시술을 받게 될 테니 상징적인 의미에서 거리에 시술 센터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홍보하게 될 좋은 기회였으니 Cade 입장에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따지고 보면 건물주와 토지주 입장에서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경제는 곧 회복될 것이고 시술을 받은 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기념으로 이 상징적인 거리에서 명품 하나쯤 구입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세계는 무너지고 있었다.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감당하지 못한 국가들은 점차 파산하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의미의 재화들은 그 가치를 잃었다. 평생 노예나 다름없이 일해도 자신이 묻힐 1 에이커조차 구할 수 없어 작은 도자기에 재로 담겨야 했던 사람들은 그동안 실존한다 믿었던, 적어도 그 영향력만큼은 신뢰할만하다 여겼던 모든 것을 부정했다. 산업혁명 이후 부단한 유통과정에 편입된 노동과 작업은 이제 목적의식 없이 세계의 표면을 떠도는 부유물의 부스러기가 되었고 인간은 행위할 근거를 잃었다. 종교, 정치, 법, 문화, 미래가 없는 인류에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산물은 사치였다. 단지 술과 마약에 빠져 쾌락을 좇을 뿐이었다.
수영장이 딸리 커다란 저택, 기름을 바닥에 뿌리고 다닌다는 극악의 연비를 가진 차, 명품, 파인 다이닝을 지상의 가치로 삼았던 자본가 또한 시대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진 기업은 도산하기 일보직전이었고 주식은 휴지조각이었다.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자본가들도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무너져가는 세계가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에게 이 거리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 아니었다. 제3 상업지구는 그들의 자존심이었고, 대중과 그들을 구분하는 선민의식의 표상이었으며 몇 남지 않은 실재하는 과거의 영광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 거리를 넘겨줄 리가 없었다. 대다수는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의심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한들 과연 인간이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전에도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었다. 신체 일부분을 기계로 대체한다거나, 인공 장기 농장을 차려 노쇠한 장기를 대체한다는 등 여러 기괴한 방법들이 제안되었지만 윤리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 모두에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한 과거가 제3 상업지구의 실세들로 하여금 Cade와 대립 관계를 맺게 만들었다.
게다가 프로젝트가 성공한다 해도 그들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프로젝트의 성공은 곧 인류가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늙어서 노쇠할 일도, 위협에 처해 죽을 일도 없었으며, 설사 기능이 정지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는다고 해도 Cade의 시술로 금세 회복할 수 있었기에 인간은 이전처럼 불타는 욕구를 가지지 않을 거라는 게 자본가들의 예측이었다. 예측의 동기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지만, 그들의 예측은 의도치 않게 미래를 관통했다. 생존에 대한 욕구가 결여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예속되어 있지 않았다. 순리에 어긋난 삶은 인간이 가진 스스로의 실존 조건을 무력화했고 삶의 동력이 되는 규범적 토대 또한 부수었다. 인간은 이제 자연에 속하지 않았다. 세계는 그대로 존재했지만 인간은 세계의 법칙에서 벗어난, 그야말로 부유물이 되어 표면을 떠돌 뿐이었다.
Cade는 제3 상업지구의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이 발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우선 언론을 장악한 Cade는 제3 상업지구의 주인들을 인간의 진화를 방해하는 적으로 규정하는 뉴스를 연일 내보냈다. 평소에도 궁핍한 삶에 지독한 환멸을 느끼며 자본가 계급에 불만을 가진 세계의 시민들은, 현재 자신이 겪는 모든 문제가 마치 자본가들의 횡포로 인해 벌어진 것인 마냥 지탄을 아끼지 않았다. 정치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비판을 시작한 것은 Cade를 뒷배에 두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정치란 으레 그렇듯, 기회를 포착한 대부분의 정치인은 자본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정치인들은 공산주의자라도 되는 것 마냥 철 지난 이데올로기를 들먹이며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을 나누어 과격한 정치 운동을 벌였다.
Cade가 던진 작은 돌의 파문은 세계 곳곳에 퍼져나갔다. 제3 상업지구와 유사한 각국의 상업 중심지는 언론, 정치인, 시민 모두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렇게 무너진 상업지구는 너무나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Cade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사실, Cade에게 굳이 제3 상업지구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시술소를 짓기에 적합한 부지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고,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의 관심 또한 매우 컸기에 어느 곳에 짓는다 해도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Cade가 상업지구를 고집한 이유에 대해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설치해야 시술자를 많이 모집할 수 있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지역이 가진 자들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큰 곳이라 민심을 통합하기 위해 그랬다는 의견도 꽤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기철이 박사를 통해 듣기로 실상은 조금 달랐다. 박사는 기철과 술을 마시며 이 일을 두고 '당시 Cade의 수뇌부가 스스로의 힘을 가늠하고 싶어서 벌인 난장판' 라며 욕설을 내뱉었다. 뚜렷한 목적의식도, 수단에 대한 자기 검열도 없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것이다. 기철은 박사의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취했으니 들어가자며 재촉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농담인 것이 아니라 이 상황 자체가 코미디였다. 행동이 불러올 결과를 알지 못하고 행동하는 Cade는 총을 손에 쥔 채 이리저리 쏴대는 어린애와 다를 바 없었고, 결국 제3 상업지구를 비롯한 세계의 자본가 계급은 무너졌으며, 찬란했던 거리는 파괴와 먼지에 뒤덮인 채 Cade의 시술소만이 외롭게 거리를 지키게 되었다.
박사의 혐오를 알고 있는 기철에게 박사의 행동은 아이러니로 다가왔다. 상업지구에 대한 Cade의 행동을 그토록 경멸하던 박사가 출장까지 쓰며 그곳에 갈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기철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지만 박사의 행적에 대한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박사가 최근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연구실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직감이 박사의 이상 행동이 제3 상업지구와 관련 있다고 외쳤지만 철저한 검증 없이는 확신하지 않는 그의 '연구자 자아'가 직감의 섣부른 판단을 막아섰다.
유진이라면 어떻게 할까. 기철에게 유진은 단순한 연인 그 이상이었다. 자신에게 없는 직감, 감성을 누구보다 풍부하게 지닌 그녀는 그에게 부족함을 채워주는 잃어버린 반쪽이었다. 과도한 생각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직전, 언제나 그를 생각의 늪에서 꺼내주었던 것은 유진의 밝게 빛나는 미소였다. 그래서 그는 생각이 넘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을 때 유진을 떠올리며 그녀가 할 법한 행동을 떠올리고는 했다. 유진은 고민할 때 의자 위에 다리를 모아 올린 후 몸을 한껏 말아 손톱을 물어뜯는다거나, 바닥에 누워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고는 했다. 그렇게 하면 머리가 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해져서 마음 가는 대로 상상의 붓을 놀릴 수 있다나.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기철은 진한 웃음을 지으며 서류를 챙겨 방을 떠났다. 그의 얼굴에는 유진과 닮은 생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