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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06. 2023

필멸의 방정식(9)

기철은 그 길로 연구소를 빠져나와 택시를 잡으려 했다. 유진의 대범함을 장착하고 기세 좋게 연구실을 나왔지만 중앙 로비에서 보안팀을 마주하자 어깨가 움츠려드는 것은 그의 어찌할 수 없는 천성 때문이었다. 애써 발 끝에 힘을 주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묵묵히 길을 걸었으나, 직원들이 건네오는 가벼운 목인사도 자신의 어색한 행색을 훑어보는 듯하여 괜히 등 뒤가 축축해졌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기철은 몰래 담배를 피우다 교사에게 걸린 학생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짝 뛰었다.

"아... 제가 놀라게 했나요? 죄송합니다."


기철을 놀라게 한 사람은 그에게 박사의 출입 명부를 건네준 출입자 관리 부서 직원이었다. 그는 기철만큼이나 어색하고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들고 해칠 의향이 없었음을 필사적으로 내비쳤다.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며 걷느라 예상치 못해서 잠시 놀랐을 뿐입니다. 정말 괜찮으니 가서 일 보세요."


기철은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빠르게 손사래를 치며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직원에게는 용건이 있어 보였다.


"아 네, 안 그래도 기철 씨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올라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저에게 요?"


순간 팔에 닭살이 돋으며 피가 빠르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이 당겨오고 입술이 바짝 마르는 불쾌한 감각이 그를 엄습했다. 출입 관리 부서 직원이 나를 찾을만한 이유가 뭐지? 머리를 빠르게 굴려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늘 일을 제외하고 연구소에 책 잡힐만한 일이 있나 떠올려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굳이 있다면 지각을 하여 출입 카드를 찍지 않고 비상계단으로 몰래 들어간 일이지만, 그것도 몇 개월은 지난 일이며 그에 관한 사유서도 제출했었다. 지금 자신을 찾아올 만한 일이 아니었다.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가죽과 맨살이 비벼질 때 나는 기분 나쁜 비명이 작게 울렸다. 기철은 로비를 힐끗거리며 도주로를 확인했다.


"예, 헤드가 부르십니다."


기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비틀거리며 급격하게 안색이 나빠지는 그의 모습에 직원이 괜찮냐고 물으며 다가왔지만 대답할 힘도, 정신도 없었다. Dr. Lee 그 여자가 나를 찾는다고?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을 찾을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리처드 박사가 사라지기 전에는 연구 진척도를 묻거나 필요한 자재를 요청하라며 그를 종종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박사가 사라진 지금, 그녀가 굳이 기철을 호출할 이유가 없었다. 기철에게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호의에 가까웠지만 기철은 그녀가 보여주는 호의는 박사의 천재성과 집착에서 나오는 놀라운 결과물에 근거한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호출이 두려웠다.


"어떤... 이유에서 저를 찾으시는지 아는 게 있습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 오전에 리처드 박사님의 기록을 찾으시는 것 때문이가 하여 제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았으나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그저 연구원님을 찾아서 보내달라 하시더군요."


기철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며 물었지만. 직원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짐작하기로는 두 가지 사유가 떠올랐다. 첫째로, 박사의 행방을 묻지 않을까 싶었다. 박사는 Dr. Lee에게 단순한 부하 연구원 그 이상이었다. 헤드라는 직함은 그녀가 가지고 있지만 Cade lab이 현재의 위치에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든 것에는 리처드 박사의 공헌이 적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를 사람들이 반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상적인 배경을 마련하여 대중화에 공헌한 것은 리처드 박사였으니 유명세 자체로는 박사 쪽이 높았다. 박사가 Dr. Lee에 비해 부족한 측면이 있다면, 욕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Dr. Lee가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편을 만들고, 외부의 기업과 국가에 빚을 지우며 영향력을 확대할 때 리처드 박사는 연구소에 틀어박혀 연구만 지속하고 있었다. 결국 '인간 생명력의 유한함과 그 숭고함에 대한 고찰' 같이 자신의 성과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논문을 완성할 즈음, Dr.Lee는 연구소를 완전히 장악했고 리처드 박사에게 'Cade 인문학 연구소 헤드'라는 이름뿐인 직함을 선심 쓰듯이 던져주었다.


박사는 그런 대접에도 불평을 하거나 Dr. Lee에게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꾸준히 논문을 작성하고, 요청한 실험 결과를 제출할 뿐이었다. Dr. Lee는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능력 있는 사람, 그렇지만 자신에게 도전할 의지가 없는 사람. 리처드 박사는 Dr. Lee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항간에는 그녀가 박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는 소문이나 사무실에 둘이 함께 다정히 있는 모습을 봤다는 염문설이 돌기도 했는데, 바로 옆에서 박사를 지켜본 기철의 입장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박사는 연구를 제외하고는 세상 모든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가족까지도. Dr. Lee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냉혈한이라 욕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그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다. 박사가 돌덩이라면 그녀는 용암이다. 활활 타오르며 지나가는 길에 놓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 가정도 꾸리지 않고, 친구도 만들지 않은 채 끝없이 뻗어나가는 욕망의 화신이 바로 본질이었다.


기철이 보기에 그녀는 어떤 면에서 박사와 닮아 있었다. 그들은 한번 목표를 정하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가는 불도저였다. 그래서 그를 견제하였다. 연구소의 구석으로 박사를 비롯한 그의 팀을 내몰고 식당에서 주문을 하듯 필요한 연구를 주문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그녀의 목적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니 함부로 내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박사와 기철에게 호의 어린 시선을 보여주어 붙잡아둔 것이리라. 말하자면 박사는 Dr. Lee에게 강력한 경쟁자였다. 동시에 유일하게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두 번째는 정말로 기철에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에 부른다는 시나리오다. 첫 번째 사유에 비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이유는 아니었다. 기철은 박사의 제자로, 박사가 유일하게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학부시절, 기철의 집요함과 감수성을 알아본 리처드 박사는 그를 반강제로 대학원 과정에 편입시켜 자신의 밑에서 연구를 돕게 했다. 학문에 뜻이 없었던 기철은 대학 졸업 후 변호사가 되려 했었다. 억울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겠다거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거나 하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 선택한 진로였다. 기철이 리처드 박사의 강의를 수강하게 된 이유도 수월한 로스쿨 진학을 위해 학점 관리 차원에서 학점을 잘 주기로 소문난 박사의 강의를 굳이 찾아 신청한 것이었다.


박사를 따라 연구팀에 들어가기로 한 것도, 마침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Dr. Lee가 박사를 찾아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할 테니 함께 연구소를 차리자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박사의 인품에 감명을 받아서도 아니고, 그의 철학에 깊이 동조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변호사가 되는 것보다 더 큰돈을 당장 벌 수 있었기에 선택했다. 기철에게는 그저 그뿐인 일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기철도 박사의 터무니없는 사상을 현실로 이루어주는 Dr. Lee의 기술에 압도당했다. 돈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대로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세계는 더 이상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Cade를 창립하는 시점에 박사와 함께했으니 기철도 창립 멤버라 할 수 있었지만 Dr. Lee는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기철을 박사의 조수쯤으로 본 것이리라. 그 짐작이 당시에는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고, 기철 또한 그녀의 관심을 받는 것에 열정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애매모호한 관계는 수많은 시간이 흘러 Cade가 세계의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고, Dr. Lee가 연구소의 주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리처드 박사가 행방불명이 된 지금, 박사의 연구팀의 헤드 노릇은 기철이 도맡아 하고 있었으니 시킬 일이 있어서 부른다는 것도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올라가면 됩니까?"


기철은 급격히 머리가 아파옴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직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박사의 행방을 찾아다닌 게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사실, 이미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보안팀이 쳐들어와 그를 잡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소 불문에 부친다는 뜻이 아닐까. 기철은 누가 앗아가려 하지도 않았는데 박사의 출입 기록이 담긴 가방을 품에 꼭 안은채 불안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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