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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11. 2023

필멸의 방정식(10)

기철은 착잡한 심정으로 작은 창문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사람들이 거대한 비행기를 날려 보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화물칸, 비즈니스 석, 라운지, 그리고 퍼스트 클래스까지 총 4층으로 구성된 이 초호화 여객기는 기내 면세점, 샤워실, 바, 스파 등 온갖 호화 시설을 갖추었으며 운항 도중 파티까지 열린다고 하니, 그야말로 날아다니는 크루즈라 할 수 있었다. 기철은 화려한 내장과 꼿꼿한 승무원의 자세에 주눅이 들어 괜스레 어뮤니티를 뒤적거렸다. 연예인들이 다니는 마사지 샵에서 사용해 유명해진 크림과 젤, 한정 판매로 부르는 게 값이라는 향수, 100% 캐시미어라는 태그가 붙은 실내복, 빌보드 차트 1위를 밥 먹듯 하는 프로듀서가 사용한다 알려진 헤드셋까지, 환상적인 명품들이 어뮤니티 박스에 즐비했다. 이들을 전부 합치면 기철의 한 달 월급쯤 되려나. 그런 물건들이 마음껏 가져가라는 듯 아무런 도난 방지 장치도 없이 다소곳하게 놓여 있었다. 기철은 더욱 주눅이 들어 사용할 엄두도 못 내고 조심스럽게 박스를 내려놓았다.

유진은 그런 기철의 심정도 모르고 오랜만에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들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비행기에서 볼 영화를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하긴, 유진이야 예술계에 종사하며 그보다는 상류층의 문화에 익숙할 테니 이런 물건들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나 보다. 그녀는 그저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들떠 보였다.


"저기, 이거 봐! 이 향수, 당신 필요할 것 같아서 사주려고 한 건데! 어떤지 맡아봐, 마음에 들면 사줄게. 찾아보니까 라운지에서 판매한대."


유진은 허공에 향수를 뿌리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향기를 퍼뜨렸다. 스모키 한 향과 상쾌함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기철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향수에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싫어하는 향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향수라는 것 자체가 싫었다. 어떻게든 자연물에서 향을 끌어내 마음대로 주무른 결과물이 자신의 육체에 스며드는 것이 싫었다. 담을 수 없는 것조차, 담아서는 안 되는 것조차 굳이 뽑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그 모습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투명한 향수병 속에서 가증스럽게 찰랑거리는 향수가, 마치 생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불쾌해하면서도 포기할 용기도 없는 자신을.


"아니, 나는 괜찮아. 마음은 고맙지만 나에게 그 향은 너무 독한 것 같네."


기철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다. 향수 냄새로 진동하는 파티장에서 종종 빠져나가며 향이 진해서 어지럽다는 핑계를 대고는 했으니 이번에도 통할 것이다.


"그래? 흐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따가 이륙하면 가보자. 괜찮은 게 있으면 골라봐!"


유진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앞뒤로 휘저었다. 좌석이 어찌나 큰지, 175cm는 훌쩍 넘는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바둥거려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천진난만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다시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을까.'


기철은 며칠 전, Dr. Lee와의 독대를 떠올렸다. 자신과 유진이 뜬금없이 이 거대한 여객기를 타고 소말리아로 향하게 된 것은 모두 그날의 대화에서 비롯됐다.


"기철 씨가 우리 연구소에서 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죠?"


기철을 부른 Dr. Lee는 그를 세워두고 그렇게 물었다. 몇 년이라니, 요즘 햇수를 세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영혼을 공유하는 듯 긴 세월을 함께하면서도 알콩달콩 지내는 기철과 유진도 50주년이 넘어가면서부터 더 이상 기념일을 챙기지 않게 되었다. 수많은 선물을 주고받으며 더 이상 상대방에게 바라는 점이 없어진 시점에 서로 챙기지 않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 뒤로 서프라이즈라며 가끔 선물을 주기도 했지만 달력에 표시해 가며 기념일을 세지는 않았다. 형식적으로나마 챙기던 기념일을 떠나보내고 나서부터는 햇수가 바뀌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도 가물가물할 지경인데 일한 지 몇 년이 지났는지 알게 뭐람.


"글쎄요... 연구만 하다 보니 세월을 잊고 지냈네요. 잘 모르겠습니다."


기철은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Dr. Lee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철 씨처럼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가 많아져야 우리 연구소에 도움이 될 텐데, 요즘 애들은 패기도 없고 끈기도 없어요. 우리 때는 뭐든지 도전해 보고 될 때까지 밀어붙였는데 말이야. 그렇죠?"


프로젝트 이후 태어난 아이들이 없어 기철이나 그녀나 요즘 애들에 속할 텐데, 무슨 헛소리인지. 잔뜩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지금 기철의 머릿속에는 어서 이 연구소에서 탈출해 박사를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를 왜 부르셨는지..."


마음이 급해서인지, 혹은 하필 긴급한 상황에 자신을 부른 그녀에게 화가 났는지, 기철은 평소의 그러면 절대 보이지 않을 모습을 보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했는지 Dr. Lee의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흐음... 뭐, 좋아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기철 씨, 시간 좀 비워야겠어요."


뒤통수가 따갑게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저 말의 저의가 무엇일까. 혹시 자신이 한 행동을 이미 알고 부른 것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그는 이미 보안팀에 끌려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으며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힘겹게 정신을 차린 기철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며 그녀에게 물었다.


"시간을... 비우라는 말씀이십니까? 무언가 시키실 일이라도..."


"예, 기철 씨가 해줄 일이 있어요. 아니, 기철 씨가 아니면 이 연구소에서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리처드가 사라진 지금, 리처드의 훌륭한 조수이자 성실하고 심지어 과학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박사의 이름이 등장하자 기철은 흠칫했다. 하마터면 가방을 놓칠 뻔했다. 이 여자가 어째서 자신을 치켜세우는 건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평소에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었으며 자신을 제외한 세상 사람들 모두 쓸모없는 쓰레기라 생각하는 여자가 말이다. 기철이 침묵하고 있자 Dr. Lee는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리처드가 없어진 이후로 얼마나 곤란한지 모르겠어요. 아랫사람들은 전부 무능하고, 남 탓만 하는 데다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전부 나에게 떠넘기는 것 밖에 없다니까요?"


그건 전부 당신이 사람을 갈아 넣어서 성과를 뽑아내니 그런 거지. 기철은 속으로 그녀를 씹어댔다. 하지만 그에게 대놓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더욱이 지금 그는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시키실 일이라는 게...?"


"아참,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돌려 말하는 건 내 성격이 아니라서. 소말리아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가서 올웨니 장군을 만나고 오세요. 자세한 것은 그쪽에서 설명해 줄 겁니다. 엄연히 Cade의 대표 대리로 가는 거니까 지원은 부족함 없이 해줄게요. 좌석은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는 아예 에어버스급으로 예약해 줄게요. 도착해서는 국빈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원한다면 기철 씨 애인도 데려가도 좋아요. 유진이라 그랬나? 오랜만에 시간 내서 여행 간다 생각하고 다녀와요."


소말리아라니, 청천벽력이다. 소말리아는 세계가 이지경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정치적 분쟁으로 인해 내전이 끊이지 않는 험악한 곳이었다. 당연히 프로젝트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드물게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 곳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눈에 희망, 미래보다는 암울한 절망만이 가득한 그런 나라다. 기철같이 천생 연구자인 사람이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기철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의 교활한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까 승낙한 것으로 여겨도 되겠네요. 당장 준비를 하세요. 이번주 내로 출발하면 됩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어느새 유진과 함께 소말리아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내부 조명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창밖에서 형광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신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진은 창에 바짝 붙어 그들에게 손을 마주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가 그에게는 작별인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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