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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13. 2023

필멸의 방정식(11)

비행은 편안했다. '하늘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안락함'이라는 캐치프라이즈답게, 자리는 몸을 누이며 두 다리를 쭉 뻗어도 남을 정도였고 완벽에 가까운 방음 설비 덕분에 소음은 일절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몸이 배길 즈음 승무원이 돌아다니며 샤워를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비행기에서 샤워라니! 호화로운 삶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기철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기철은 곁눈질로 남은 비행시간을 확인했다. 3~4시간은 족히 잔 것 같은데, 최단시간으로 도착하는 것보다 최대의 만족감을 제공하는 게 에어버스의 모토이기에 비행은 아직도 10시간가량 남아있었다. 승무원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대답을 종용했다. 습관적으로 유진을 돌아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에 취해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한 병을 다 비운 것을 보니 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한 듯했다. 저 상태가 되면 유진은 쉽게 잠에서 깨지 않는다.

기철은 하는 수 없이 샤워를 하겠다 답하며 일어섰다. 승무원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삶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지금의 세상에도 사람은 여전히 돈의 지배를 받는구나 싶었다. 아니면 진심으로 타인을 섬기는 삶이 즐거운 사람일지도. 그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승무원을 따라나섰다. 널찍한 복도를 지나며 주변을 힐끗거리니 승무원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에어버스는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 위치한 계단을 따라 층을 이동할 수 있고, 바로 아래층에는 라운지가 있으니 샤워 후 이용해 보란다. 기철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이 비행기에 탑승하기도 전에 규모에 압도되어 있었다.


향락주의와 무관심, 사람들은 양극단으로 나아갔다. 기철처럼 물욕이 강하지 않고 호화로운 삶보다는 집에 박혀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점차 세상과 돈에 무관심해졌고, 과시욕이 강하며 관계 맺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유진처럼 이러한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생존에 대한 절실함이 사라진 이후 기철은 돈과 거리를 두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남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었기에 외모도 최소한으로만 가꾸었다. 앞머리가 주체할 수 없이 뻗쳐 코를 간지럽힐 즈음 주방 가위로 대충 자르고, 가끔 턱이 간지러울 때 면도를 하는 정도였다. 그 이상은 그에게 필요가 없었다. 통장에 쌓여만 가는 돈도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시술을 받기 전부터 생활력이 부족하다는 소릴 듣고는 했지만 시술을 받고 나서부터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유진이 관리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녀도 자신의 삶이 있는 만큼 온전히 기철을 뒷바라지해 주며 살 수는 없었다.


그러한 기철에게 이 거대한 강철 돌고래는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내부라고 다르지 않았다. 벽은 온통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었고 천창에는 어떻게 고정했는지 모를 샹들리에가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일을 시키려고 이런 대접을 해주며 소말리아까지 보내려는 것인지, 속이 쓰려왔다. 승무원을 따라 들어간 화장실도 화려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인테리어는 둘째 치고, 선반에는 간이 작은 사람이라면 기절할 만큼 호화로운 바디로션과 샴푸가 비치되어 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것이냐는 기철의 물음에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승무원은 프로답게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일회용이라 답하고는 마사지와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놓을 테니 샤워가 끝난 후 벨을 눌러 불러달라고 했다.


승무원이 자리를 떠나고 혼자 남은 기철은 세면대에 걸터앉았다. 탑승전 안내문에서 담배를 펴도 된다는 말이 있었기에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비로소 안정이 되었다. 조금 여유를 되찾자 끝내지 못한 일이 스멀스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사의 행방을 알아보기도 전에 소말리아로 떠나게 된 것이 계속 걸렸다. 연구소 측에서는 이미 박사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사람 하나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리처드는 수색을 피하기 위한 특수한 훈련을 받은 자도 아니었고 길거리에서 싸움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육체의 고난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박사가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원으로 이루어진 Cade의 보안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박사가 잡히고 나면 곧 박사의 지난 행적에 대해 연구소가 알게 될 테고, 박사의 떳떳하지 못한 친구들이 Dr. Lee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다. 어디까지나 지레짐작이기는 하지만, 박사의 최근 모습이나 그의 예상 목적지로 미루어보아 정부나 Cade에 반대하는 자들과 함께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된다면 박사는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강제로 연구를 계속해야 할 것이고 박사의 친구들은 실험체가 되어 전신이 낱낱이 분해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박사님...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기철은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카락 위로 담뱃재가 살포시 내려와 쌓였다. 박사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기철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것은 박사가 그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박사와 기철은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고는 해도 그들이 함께한 수많은 세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기철은 박사를 은사로 모셨으며 박사는 기철을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했다. 그래, 그들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넘어 서로의 철학과 정신을 이해하는 친구로 발전했다. 유진, 기철, 니시무라, 박사 이렇게 네 명이서 퇴근 후 집 근처 펍에서 자주 모여 진지한 이야기부터 시시콜콜한 잡담까지 나누곤 했었다. 그러다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다 같이 담배를 태우거나 다트, 당구 따위를 하며 술값 내기를 하기도 했다.


즐거운 추억이 떠오르자 기철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반짝거리는 벽에 반사된 얼굴을 보았다. 죽은 동태처럼 생기 없는 눈빛이 바짝 마른 해골에 애처롭게 걸려있었다. 며칠간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자신이 당장 박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어서 일을 마무리하고 귀국해야 했다. 이제야 연기가 걷히고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박사의 행방을 Cade보다 먼저 찾아야 했고, 니시무라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의 비밀도 밝혀야 했다. 상대적으로 Cade의 손아귀에서 자유로운 유진이 있었지만 그녀에게 이토록 큰 짐을 맡길 수는 없었다.


기철은 힘을 주어 담배를 으스러뜨렸다. 피다 남은 재와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소말리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 빠르게 해치우고 돌아갈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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