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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18. 2023

필멸의 방정식(13)

리처드 박사는 이곳에 도착한 뒤로 과거의 삶을 완전히 잊고 지냈다. 겉으로 봐서는 저항군이니, 반란군이니 거창한 이름과 다르게 이들의 하루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적당히 나이가 찬 어른들은 일어나자마자 배양소에 출근해 배양육과 식용 채소를 돌보았으며, 아이들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학교로 뛰어갔다. 얼굴에 주름이 성성한 노인들은 무너진 천장 틈새로 비치는 한줄기 햇빛에 의지한 채 평상에 앉아 아이들이 재잘대며 뛰어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기껏해야 백 년 남짓 살았을 어린 자들이 노인이랍시고 세상일에 초탈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게 퍽 우스웠다.

그렇다고 이들이 단순히 원시적 형태의 협력 공동체를 지향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랜버본을 비롯한 특출 난 자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범인을 압도할 만큼의 재능을 지닌 자들은 박사가 생각하는 '본격적인' 저항 활동을 이어갔다. 그들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우선 저항군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그리고 그들이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자원을 확충하기 위해 Cade의 자재 관리 부서를 습격하여 실험에 사용되는 무기, 약물, 장치 등을 약탈했다. 습격에서 돌아온 이들이 가져온 자원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사가 Cade의 내부자였던 만큼 실험실에서 인간실험이 자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연구소에 보급되는 자재 목록을 직접 점검하는 그가, 연구소 직원들이 소비하는 양보다 많은 양의 식량이나 의복 따위가 들어오는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박사는 그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다. 그의 침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자신이 나서봤자 바뀌는 것이 없기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무관심과 패배주의에서 기인했기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험체들을 보고 박사가 느낀 것은 동정, 속죄가 아닌 무기력과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 박사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피하고 침묵했다.


박사의 불편함과는 별개로 실험체들은 저항군 생활에 잘 적응했다. 과도한 실험으로 스페어 취급을 받으며 전신이 어그러진 남자도, 실험실에서 태어나 바깥세상을 모르고 지내온 어린이도, 술에 취해 길거리를 배회하다 납치당해 전신이 난도질당하는 끔찍함을 경험한 대학생도 성실하게 일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온갖 문명의 이기로 가득한 바깥에 비하자면 이곳의 생활이 불편할 것이 당연했지만 Cade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들의 몸짓과 말에는 해방감이 가득했다. 박사는 실험체였던 자들이 느끼는 해방감이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했지만 삶이 예속된 채 살아가는 박사에게 해방감이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랜버본이나, 바티스나 그에게 자유롭게 행동하라 일러두었지만, 사실 박사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일상을 최대한 눈에 담았다.


"무얼 하고 계십니까."


뒤에서 박사를 부르는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랜버본이었다. 그는 여전히 기괴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을 자랑했다. 박사도 키가 꽤나 큰 편인데, 랜버본이 그의 앞에 서면 언제나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냥... 구경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마을 사람들. 그대가 나보고 자유롭게 다니라 하지 않았소. 하지만 나는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누릴 줄도 모르니 그저 바라보는 것이오. 마을 사람들을 보면 좀 알까 싶어서."


랜버본은 동굴이 울리는 듯한 저음의 목소리로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좀 알겠습니까? 자유가 무엇인지?"


박사는 고개를 모로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잘 모르겠소. 솔직히 말하자면 자유는 고사하고 저들을 볼수록 외면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만이 감돌뿐이오. 차라리 힘이 있던 시절에 바꾸려고 시도라도 할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불편한 침묵이 둘을 맴돌았다. 랜버본도, 박사도 서로 할 말을 찾지 못해 공연히 발끝으로 바닥을 찰뿐이었다.


"박사님."


이곳 사람들은 어째선지 자꾸만 불현듯 나타난다. 랜버본처럼 어디에 숨기기 어려운 덩치를 가진 이조차 기척을 숨기고 다가와 그를 놀라게 한다. 박사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불편한 침묵이 깨진 것을 다행이라 여겼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바티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미소와는 다르게 그녀의 행색은 남루했다. 군데군데 찢어진 옷에 부스스한 머리칼에 붙은 흙먼지들, 그리고 얼굴에 튄 채로 검게 굳어버린 핏자국까지, 아마 저항군의 '두 번째 활동' 때문에 이토록 난잡한 행색이리라.


"바티스."


박사는 그녀를 향해 존중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살아온 세월로 치자면 박사가 그녀에 비해 십 수배는 더 살았을 테지만 존중의 방향이 나이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를 보며 알았기에 박사는 이곳에 온 후로 줄곧 그녀에게 존경을 표했다. 정확한 나이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시술을 받지 않았다는 것, 그럼에도 팽팽한 피부와 생기 넘치는 또렷한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젊음을 짐작케 했다. 그동안 리처드가 본 바티스는 젊은 나이에 걸맞은 용기와 행동력을 가진 사자였고, 세상의 도덕을 자신의 주관대로 주무르는 순수한 어린아이였으며, 결심한 바를 묵묵히 이어가는 낙타였다. 하릴없이 연구와 씨름하며 세상을 등지고 영혼을 상실한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그래, 마치 니체가 말한 '초인' 같은 여자였다.


"새로 얻은 정보라도 있습니까?"


바티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며칠 전 저항군의 활동, 그러니까 정보 수집을 위해 마을 밖으로 나가 Cade 본사에 잠입했다. 그들은 그저 정부와 Cade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숨어든게 아니었다. 저항군의 목표는 세계를 정상으로 만드는 것, 이데올로기와 재화 같은 속세의 가치를 넘어 인간다운 인간이 자유롭게 지상을 거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항군은 Cade를 주적으로 설정하고 정보를 빼냈다. 그들은 연구소에 잠입해 현재 연구하는 자료나 기밀로 취급되는 실험실의 위치 등을 빼돌려 이를 바탕으로 습격을 진행했다. 테러리즘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어쩌겠는가. 세계를 움직이는 공룡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뿐인 것을.


"박사님, 혹시 기철이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박사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반가움보다 착잡함을 느꼈다.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며 함께 연구했고 일상을 공유한 기철을 두고 온 것에 미안함이 앞섰던 것이다. 기철을 생각하자 니시무라가 떠올랐고 니시무라를 떠올리자 유진이 생각났다. 기철, 니시무라, 유진 그리고 리처드 박사. 이렇게 네 명은 서로 좋은 친구이자 동료였으며 무채색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색을 칠해주는 존재였다. 자신은 그런 그들을 두고 떠났다. 자신의 죄에서 도망치고자, 죄책감을 덜고자 떠난 것이다.


'나란 놈은 끝까지 이기적인 녀석이구만.'


"예... 알고 있습니다. 동료이자 친구였던 녀석이지요.


박사는 겉으로 자책을 표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며 대답했다. 세상에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에 더해 자신을 위로해 주는 좋은 사람들까지 내버렸다 생각하니 도저히 재활용할 수 없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본사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기철이라는 분이 소말리아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간 수집한 정보를 종합하면 박사님이 저희를 찾아온 후 Cade에 사소한 결함이 번지고 있습니다. 자재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연구 또한 구심점 없이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지고 있답니다. 박사님이 친구가 소말리아로 향한 것도 시술 혜택을 받지 못한 국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재를 급히 조달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리고 그 자재는 높은 확률로 '인간'일 것이고요."


소말리아, 기철처럼 심약한 녀석이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분명 혼자 가지는 않았을 테니 유진이 따라갔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은 아마 올웨니 장군일 것이고. 머릿속에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아마 올웨니를 만나러 갔을 겁니다. 소말리아의 군벌인데, Cade에 정기적으로 자재를 납품하고 무기나 식량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평화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주머니만 불리는데 혈안인 악질이지요. Cade 입장에서는 다루기 편한 파트너여서 물밑으로 자주 거래했습니다."


바티스는 박사의 설명을 듣고 턱을 괴는 자세를 취했다. 잠시간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이 선 듯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박사님 말대로라면 Cade가 상당히 급한 모양이군요. 기회가 온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계획을 실행해도 되겠네요."


"계획이라면...?"


"우리는 Cade를 무너뜨릴 겁니다. 정확히는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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