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트사과 Dec 15. 2023

필멸의 방정식(12)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항에 내리니, 쾌활한 인상의 흑인이 기철과 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내전과 동떨어진 세계에 살기라도 하는 듯 그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가졌고, 정장을 갖춰 입은 차림새는 기철보다 멀끔했다. 유독 새하얀 이를 드러낸 그는 해칠 의향이 없다는 뜻인지 두 손을 얼굴 옆으로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Cade에서 오신 분 맞으시지요?"


그의 유창한 영어에 놀라며 기철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에서 늘어져있던 유진은 어느새 단장을 마치고 다소곳이 손을 모은채 그의 뒤에 서 있었다. 비서인 척을 하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마중 나온 사람은 기철과 유진의 가방을 빼앗다시피 가져가 둘러멨다.


"짐은 이게 전부 인 가요? 생각보다 적게 가져오셨네요. 일행도 적으시고요. 소말리아에 오시는 분들 대부분은 인프라가 부족할 것이라 여기고 이사 갈 듯이 챙겨 오시던데, 오래 있을 예정이 아니신가 봅니다."


그는 차로 이동하는 내내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기철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길고 가벼운 드레스를 걸치고 화려한 장신구를 한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고, 터번 같은 모자를 머리에 두른 남자들이 제복을 입은 채 바쁘게 공항을 쏘다녔다. 파스타나 빵, 그리고 쌀로 만든 요리를 파는 식당가도 여행객으로 북적였다. 관광을 위해 소말리아에 온 것은 아니지만 기철은 소란스러운 그들의 분위기에 점차 녹아들어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금 투박하기는 해도, 그는 이 나라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사람'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있었다.


"웃고 있네요. 저 사람들."


기철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듯했지만,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웃음, 세월이 흐르며 기철이 잃어버린 또 하나의 조각이었다. 물론 유진과 있을 때 나오는 웃음이나 니시무라와 시답잖은 농담을 할 때 터져 나오는 웃음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인간이라면, 호르몬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정밀한 생체 기제를 갖추고 있다면 모두가 지을 수 있는 그러한 웃음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문틀에 발가락을 찧었을 때 새어 나오는 지독한 고통의 메아리 같은 것이다. 보다 높은 차원의, 순수하고 인간다운 웃음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기철도 자신이 그들의 웃음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잘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아마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밖에 없는 영역일 것이다. 삶과 죽음의 선택들이 위태롭게 날아드는 소나기 사이에서 겸허하게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웃음, 기철도 유진도 리처드 박사도 이제는 가질 수 없는 행복이다.


"이상하죠? 소말리아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해 내는 것이라곤 내전, 해적, 빈곤 같은 부정적인 키워드 밖에 없으니까 여기 사람들이 웃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현실도피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무리 지옥 같은 곳이라도 사람이 산다면 웃음이 피어나기 마련입니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니까요."


그의 말이 백번 옳다. '사람'이 산다면 말이지. 기철은 상념을 지우고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남자는 걸음이 빨라 거리를 유지하려면 꽤나 애를 써야 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유진이 기철을 놓치지 않으려고 몸의 반 정도 되는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대며 끌고 있었다.


"줘. 내가 끌게."


유진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대신 기철이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낚아채듯 뺐어가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방금 웃음에 대해 한바탕 상념을 가진 탓인지 그녀의 미소에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녀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 제 이름은 압디사마드 무함마드입니다. 무함마드라 부르셔도 됩니다."


어느새 트렁크에 기철과 유진의 짐을 모두 싫고 운전석에 앉은 무함마드가 돌아보며 말했다.


"시내를 둘러보시렵니까? 아니면 바로 본론으로? 올웨니 장군님이 특별히 경호에 신경 쓰라 하셨으니 치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항부터 관저까지 전부 올웨니 장군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니까요."


볼이 발갛게 상기된걸 보니 유진은 조금 돌아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기철은 그럴 수 없었다.


"바로 본론으로 가지요."


"예, 뭐. 그러시지요."


기철은 슬쩍 손을 뻗어 유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 기철에게는 유유자적 관광할 여유도, 기력도 없었다. 그는 미안함에 그녀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기대했을 텐데, 미안. Dr. Lee, 그 여자가 무슨 일을 시켰는지 몰라서 걱정되네. 게다가 어서 일을 끝내고 돌아가서 박사님을 찾아야지."


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여전히 창문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기철은 작은 한숨을 쉬며 몸을 시트에 뉘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이전 11화 필멸의 방정식(1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