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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 Jan 21. 2023

사잇길

구이 저수지 둘레길을 걸으며

        사부작사부작 구이 저수지 둘레길을 걷다                                                                                                           

 어느 날 갑자기 몰려드는 외로움이 있다.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순간 모든 것들의 의미가 퇴색되고 성가셔서 주춤거려지는 때,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이 둥둥 떠다닐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햇볕 다사로운 흙길을 거닐면 어떨까? 강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고 납작 엎드려 온몸으로 차디찬 기운을 받아들이는 소리쟁이나 지칭개, 보랏빛으로 단단히 무장한 냉이, 배배 말라버린 채로 씨앗을 달고 있는 잡초들을 대한다면 그들의 소리 없는 질책이 멍한 의식을 깨워주지 않을까? 나 홀로 나서기가 두려워서 옆에 있기만 해도 평안해질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위로를 받으면서 함께 걷다 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리라.  흔들리는 외로움을 견고한 고독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그와 구이저수지 둘레길을 산책하기로 했다.


 출발지는 완주군 덕천리에 있는 #대한민국 술테마박물관이다. 하늘을 본다. 아침에는 잠포록한 날씨여서 행여 비를 만날까 조바심이 일었었다. 오전 10시, 해가 몸을 서서히 풀어내기 시작한다. 먹구름이 걷힌 겨울 하늘은 더 드높고 고추바람도 잠들었는지 걷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다. 다만 박물관 전시장은 코로나19로 인해 임시 휴관이라서 아쉬웠다.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하는 술’을 표현했다는 동그란 모양의 박물관을 바라본다. 높다. 그리고 멀다. 코로나19 시대에 가까이할 수 없는 우리들처럼.


 박물관을 등지고 #구이저수지 둘레길로 내려선다. 양옆으로 쭉쭉 뻗은 소나무가 기지개를 켜며 맑은 숨을 쉰다. 그 향기를 받아 마신다. 하나, 둘, 셋. 마신 숨을 폐부 깊숙하게 밀어 넣고 잠깐 멈춘다. 온몸을 돌고 나온 숨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서서히 내쉰다. 얼굴을 감싸는 바람이 명지바람처럼 보드랍다. 돌아오는 신축년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이 공기와 바람을 누려볼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내려가니 경각길과 모악길의 갈림길이 나온다. 아들을 낳고 싶은 사람은 경각길로, 딸을 낳고 싶은 사람은 모악길로 가라 한다. 이유가 궁금하지 아니한가? 경각산(鯨角山)은 고래의 형상을 가진 산으로 남성을 상징하고 모악산(母岳山)은 어미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는 산으로 여성을 상징한단다. 먼 옛날 경각산이 모악산에게 청혼을 하였고 그 결실로 생명의 근원이요, 풍요의 상징인 구이저수지 물이 풍성하게 차오를 수 있었다는 전설이 흐르는 곳이다. 이런 까닭에 이곳에 오면 사랑이 이루어진단다. 우리는 모악길에서 출발해 경각길로 돌아오기로 했다.

사랑의 열쇠

구이저수지는 봄이면 아름드리 벚나무의 향연에 초대되어 봄을 만끽할 수 있다. 여름에는 나무가 만들어 놓은 그늘이 풍성하여 더없이 시원하게 산책할 수 있다. 특히 가을에는 구이면에서 걷기 행사를 진행하니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해도 좋을 것이다. 아쉽게도 8회째인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하여 행사할 수 없었다 한다. 어디나 코로나19에 잠식된 것 같아 답답해진다. 속히 이 검은 태풍이 물러나기를 바랄 뿐이다.


 저수지 주변으로 만들어 놓은 판잣길을 걷다 보면 윤슬의 반짝거림을 대할 수 있어 덩달아 기분도 반짝거린다. 다시 능선으로 이어지는 흙길,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걷는다. 대숲을 지나 내려서자 여러 대의 낚싯대가 주인 없이 물에 담가 있다. 누가 잠시 강태공이 되어 여유를 낚고 있었던 것일까? 빈 의자에 겨울 햇살만 노닐고 있다.


  낚시터를 지나자 일흔을 넘긴 듯한 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다. 분홍 남방에 청바지 차림의 남자. 호호백발에 갈색 선글라스를 걸쳤다. 그의 아내인 듯한 여인 또한 분홍 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이들의 젊은 가을이 멋스럽다. 이팔청춘의 남녀를 만난 것보다 더 반갑다. 눈인사를 하며 그들의 여유를 뒤로하고 앞서 걷는데 문득, 나도 훗날 저런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낼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신체 리듬이 흐트러질 때가 많은 요즘의 상태로는 다소 미심쩍어진다.


 구암 마을과 전망 쉼터 방향으로의 갈림길이 나온다. 우리는 감나무가 있는 전망 쉼터 쪽으로 향한다.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빨간 까치밥 하나. 하나여서 더 애잔하면서도 농부의 마음이 걸려 있는 감이 더욱 정겹다. 감나무 밑동에 울퉁불퉁 몸부림친 흔적이 보인다. 어릴 적에 아버지도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였었다. 그땐 ‘왜 감나무는 홀로 서지 못하고 고욤나무의 뿌리를 얻어야만 할까?’ ‘왜 고욤나무는 감나무로 변신을 해야만 할까’ 궁금했었다.

  “살다 보면 네 뜻대로만 살 수 없을 때가 있어. 그때는 과감히 삶의 방향을 바꿔봐. 여기 고욤나무처럼 맛있는 열매를 얻기 위해 밑동만 남기고 다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이 시기가 바로 변신의 때임을 안다. 급속도로 변화해 가는 이때, 난 무엇을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까? 이 변화의 물결을 타고 넘어설 수 있는 지혜와 결단력과 실천력이 필요함을 접목된 감나무를 보며 깨닫는다. 앞서 걷던 그가 흥얼거린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란 노래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그는 군대에서 첫 휴가 나왔을 때, 음향시설을 완전하게 갖춘 친구 방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전율을 느꼈단다. 살면서 때때로 울림을 주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노래란다. 물 위에 내려앉아 흐르는 노랫말처럼 저수지에 내려앉은 청둥오리들이 유유히 노닌다.


 “바람만 불면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흥얼거리다 보니 구이저수지 제방길로 빠져나온다. 출렁다리를 지나 호수 마을을 거쳐 망산 마을을 통과하고 다시 산길로 접어들어 술박물관까지 8.8km! 그와 함께 걸으니 무리 없이 완주할 수 있었다. 시야가 툭 트인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한 마리 거대한 새가 날고 있다. 겨울바람을 타고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저기 #경각산 활강장에서 출발 직전 벌벌 떨며 긴장했을 그들이 불과 몇 초 뒤엔 환희에 젖어 비행시간이 오히려 짧게 느껴질 정도로 경이로울 것이다. 따다닥 3초만 달리면 몸이 부웅 떠오르겠지? 구이 저수지를 담은 풍경과 구암, 칠암, 태실, 광곡, 평촌 등 정겨운 마을들을 내려다보며 날아다닌다. 기상이 허락하면 서해안이나 마이산까지도 볼 수 있다니! 저기 경각산 마루에 서서, 모악산으로 넘어가는 노을까지 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인생샷이 될 것이다. 나도 이순(耳順)이 되기 전에 가슴이 뛰는 저 경험을 해보리라.


  내가 삶을 살아가다 마음이 지칠 때, 이 둘레길을 찾아 걷는 것처럼 어쩌면 불청객이라 생각했던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삶과 삶 사이에도 잠시 쉬어가야 할 사잇길이 생긴 게 아닐까? 이 길이 끝나면 곧 큰 길이 나올 것이다. 마음껏 호흡하며 날아갈 그날을 위해 사잇길에 숨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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