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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햇살 Feb 14. 2023

다시, 결혼식

리마인드 웨딩은 청춘 회복이다.

    

 오손도손(사위인 도현과 딸 소연, 부부를 부르는 애칭)의 결혼 일주년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둘은 서울로 2박 3일 여행을 갔습니다. 올라가서 기념 사진도 찍고 미술관 전시회도 보기로 했답니다. 요즘 유행어로 호캉스라나. 코로나19가 아직도 발목을 붙잡는 바람에  둘은 조용하면서도 편안한 여행을 계획했답니다. 참 예쁜 신혼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말 그대로 워라밸이죠.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을 이룬다는 워라밸. 개인의 업무와 사생활 간의 균형을 묘사하는 단어로 1970년대 후반 영국에서 처음 등장했다는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그 열풍이 여전한가봅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또 쉴 줄 아는 멋쟁이들입니다. 이 예쁜 아이들이 자기들 여행을 실행하기 전에 우리에게도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의 결혼 30주년을 축하하면서 리마인드 웨딩 (remind wedding)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만사를 귀찮아하는 아빠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흰 머리카락이 이렇게 가득한데 무슨 사진이야. 귀찮게"

 "아빠, 요즘엔 다들 이런 사진 남겨요. 엄마,아빠도 기념하게요."

"꼭 해야 돼?"

" 한 삼십 분만 시간을 내봐요."

 “썩소를 날려야 한다는 거지? 성가시게.”

 '썩소!' 왜 이 한마디가 가슴을 찔렀을까요? 은근한 설렘과 기대로 들떠있던 내 마음이 싸늘하게 가라앉았습니다. 예전처럼 뜨거운 사랑이 남아있을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마음을 눈곱만치도 헤아리지 않느구나, 내가 그다지 마음에 안 차서 그런다고 판단 내렸습니다. '말본새 하고는 흥, 나도 싫다.' 오기가 가득 찼습니다. 나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살짝 성가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식적인 이런 행사가 무의미하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오손도손은 계획대로 진행시켰습니다. 결국엔 염색도 하지 않은 하얀 머리의 아저씨와 신혼 때보다 십 킬로 이상 살이 오른 펑퍼짐한 아줌마는 촬영장에 갔습니다.


 마리힌(결혼 예식 전문)에 전시된 드레스는 휘황찬란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나잇살로 치부하며 포기했던 뱃살을 보니  공주 같은 드레스를 입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아줌마를 넘어서서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괜한 짓을 한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매니저님이 골라준 드레스는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뱃살도 사라지고 신데렐라가 된 듯 화려한 변신이 이루어졌습니다. 전문가가 해주는 신부 화장도 변장 수준이었습니다. 농장일로 가무잡잡해진 피부가 뽀샤시 해지고  지쳐있던 눈빛까지도 초롱초롱해졌습니다. 눈 밑에 자글자글하던 주름살도 사라지고 콧날도 우뚝 섰습니다. 코에 생기가 들어오는 듯 모든 것이 싱그러워졌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내 눈을 더 크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봐도 내가 참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촬영장으로 들어서니 거기에는 삼십칠 년 전 남자 친구가 앉아 있습니다. 훤칠한 키에 쏙 들어간 뱃살. 뽀얀 피부에 오뚝한 콧날,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 암청색 양복이 모델처럼 잘 어울리는 그이가 설레는 눈빛으로 미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수줍은 듯 어색한 듯 살짝 벌린 입술에 순수한 미소가 걸렸습니다. 다시 한번 더 그를 살펴보게 되더군요. 썩소가 아닌 환한 미소. 갱년기를 겪는지 기운이 없고 만사를 귀찮게 여기던 그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아, 스물한 살의 청춘을 함께 했던 그이였습니다.


 카메라 기사님이 요구하는 대로 갖가지 포즈를 취했습니다. 앉아서 마주 보며 웃기도 하고 서서 토라진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살며시 안아주기도 하고 

"오호, 신부님 미소는 백만 불입니다. 자연스러워서 그대로만 하면 됩니다."

한마디 칭찬에 어깨가 으쓱 올라갔습니다.  햇사위 앞이라서 조금 어색했었는데 이젠 마치 배우가 된 듯 오손도손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의식되지 않았습니다. 더 자신 있게 포즈를 취했습니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싱크대 앞에 거울을 놓고 웃는 연습을 해서 그런가? 스스로 평하면서 즐겼습니다. 그러나 그이는 이미 굳어져버린 표정을 푸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웃는 표정이 제일 어색해서 근육을 펴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는 그의 미소는 그야말로 썩소였습니다. "이래서 안 하려고 했지."고개를 갸웃하며 잘 안 웃어진다고 불평하는 그에게 우리는 직업병이라 어쩔 수 없다고 진단 내렸습니다. 형사생활 삼십 년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그 정도만 웃어도 훌륭하다고.


 다행히 끝나갈 무렵엔 그도  웃는 표정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촬영기사의 요구대로 무릎을 꿇고 꽃을 줄 때는 어색하지만 진심으로 애정 어린 표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삼십칠 년 전 비 오던 수요일의  표정이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썸을 탈 때였지요. 그땐 꽃이 지금처럼 흔전 만전 하지 않을 때였고 꽃배달 시스템도 없던 때였습니다. 다섯 손가락의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라는 노래가 유행해서 비 오는 수요일이면 한 겨울에도 장미를 연인에게 선사하는 새로운 문화가 생겼을 때였습니다. 가난한 유학생들의 주머니를 울리던 때였지요. 그이는 비 오는 수요일이면 중노송동에서 기린로변, 시내, 남부 시장의 꽃집까지 빨간 장미를 찾아다녔지요. 겨우겨우 한 송이를 구해서 내게로 달려왔을 때의 그 달뜬 표정이 리마인드 웨딩을 하며 살아났습니다.


 한 시간 만에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연애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청춘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무료하고 무기력해지고 무감각했던 무채색의 일상에 연두의 싱그러움이 입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워라밸의 삶에 대하여 한 수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우리가 리마인드 웨딩을 하면서 힘을 얻었듯이 이집트 미라 전시도 볼 겸 서울로 올라가 호캉스를 즐기고 있을 신혼부부는 또  현실을 살아낼 힘을 얻어올 것입니다. 사위를 얻고 보니 좋은 것이 배가 됩니다. 역시 사람의 기운은 큰 힘을 지녔습니다. 정도 많고 감성의 촉수가 발달한 오손도손은 갱년기의 어두운 터널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생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들이 선물한 리마인드 웨딩은 시들어가는 심장을 살리는 청춘 회복제입니다.


# 리마인드 웨딩 (remind wedding) #선물 #워라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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