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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마운 날들

대신할 수 없는 엄마의 투병

by 아침햇살

엄마의 투병이 보름을 넘기고 있다.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점점 시들어간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던 지난날들과 달리, 이제는 돌아서기도 전에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버린다. 고관절 수술 후 섬망 증상이 심해지신 것이다.

엄마는 젊은 날로 돌아가셔서 이웃과 친척들을 만나고, 깨를 심고, 고추밭을 매고, 콩을 터느라 밤새 잠을 못 이루신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하나둘 불러내며 말씀하신다.

“ 정목이 엄마, 거기 있으면 내 손 좀 잡아줘.”

“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간병인에게 웃으며 “해경이 엄마랑 얘기하니 재미있네.”라고 하신다.

그 순간, 나는 엄마의 시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간다.

“요렇게 시퍼런 물을 건넜어. 긍게 그게 요단강이여. 거기를 건너갔어. 아름다운 새 집들이 주루룩 나래비를 섰어. 문을 두드리며 아버지를 찾아다니다가 다섯 번째 집에서 아버지를 만났어.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네. 아마도 내가 죽을랑가벼.”

엄마는 지금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침대 아래 다슬기가 있다며 까먹자 하시고, “집에 가자, 집에 가자.”를 몇 번이고 되뇌신다. 따뜻한 돌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그곳이 편하다고, 가랑잎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나는 그저 곁에 앉아 말없이 손을 잡는다. 엄마는 기분 좋을 때나 슬프고 외로울 때 즐겨 부르던 ‘고향의 봄’도 잊으셨다. 나는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다. 집으로 모시고 갈 수도, 좋아하시는 홍시를 드릴 수도 없다. 다슬기국을 끓여왔지만 드릴 수 없다. 설사를 사흘째 하고 계시기 때문에 병원에서 만든 영양죽만 허락된다.

배를 문지르며 “엄마 손은 약손.” 하시던 그 옛날의 운율을 따라 이번엔 내가 “딸 손은 약손.” 하며 문질러 드린다. 엄마는 아기처럼 헤헤 웃으신다. 잠시 좋아지셨다가, 이내 배가 아프다고 인상을 찌푸린다. 눈을 감고 기운이 없는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무엇이든 잘 드시고 소화만 시킬 수 있다면, 다시 걸을 수 있을 텐데.’ 이 말이 입안에서 몇 번이고 맴돌다가 결국 삼켜진다.

병실을 나서면,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잠을 잔다. 지인들과 웃고 떠들며 회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웃음소리마다 서걱서걱, 죄스러움이 걸려 있다. 엄마가 병상에서 보내는 그 시간만큼, 우리의 일상은 조금씩 빚져 간다. 어쩌면, 엄마의 사랑이란 평생 갚지 못할 채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빚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오늘도 나는 병원으로 향한다. 엄마의 손을 잡으며, 아직 따스해서 고마운 체온을 다독인다. 그 온기 속에서, 오늘도 나는 참 고마운 날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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