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어느 날의 엄마
-엄마의 2019년 어느 날의 일상을 담았던 글을 옮겨 놓는다.-
“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사안골
복숭아꽃 살구우꽃 아기 진다알래...”
섬진강줄기 따라 벚꽃마중을 나가는 길, 아흔한 살 엄마는 어깨를 흔들흔들 고조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진안에서 한 시간 이십 분을 달려 도착한 구례에서부터 벚꽃이 눈을 환하게 밝힌다. 쌍계사로 오르는 길은 벚꽃이 터널을 이루어 졸던 엄마의 외씨 같은 눈도 크게 떠졌다. 열어젖힌 선루프를 통해 벚꽃 잎이 포르르 날아든다. 엄마는 목에 두른 진달래색 스카프를 풀어 무릎 위에 살포시 펼친다. 그 위로 하얀 천사가 내려앉듯 나풀나풀 벚꽃이 수를 놓는다.
“ 봉알봉알 피었어요 나도 피어나요
꽃잎을 받아요 나도 받아줘요. 그대여”
박자는 맞지 않지만 들려오는 노랫말을 바꿔 부르신다. 우리 일행은 귀엽고 깜찍한 엄마를 대하면서 여정이 더 즐거워진다. 흥이 많은 그녀임을 다시금 느끼며 기억의 우물에서 엄마의 모습들을 건져 올린다.
내가 사춘기일 때는 몰랐었다. 매일 새벽별 보고 나갔다가 저녁달 뜨면 들어올 때가 많은지라 일만 아는 억척스러운 그녀라고 치부했다. 시골 아낙이란 참으로 고되고 낭만도 없는 촌스런 구릿빛 인생이라고 여겼다. 딸의 첫 생리일도 모르고 가슴이 봉긋해진 지 오래되었어도 브래지어를 사 주지 않는 엄마가 이해가 안 갔다. 그런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시집만큼은 멀리 도시로 가리라 다짐하며 주술을 걸 듯 밥을 먹을 때마다 숟가락 잎사귀 멀리 잡으려 애썼다.
어느 토요일, 일찍 집에 오게 되었다. 잔치를 하는지 삼동네가 다 술렁이고 동네 어귀에서부터 장구소리가 고샅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전 부치는 냄새가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고 꼬르륵꼬르륵 십 리를 걸어온 허기는 잔칫집을 기웃거리게 만들었다. 지선이 엄마가 보이고 현진이 엄마도 있다. 그 친구들은 엄마의 당기는 손짓 따라 당당하게 들어간다. 우리 엄마는 일하러 가셔서 안 계시겠지 발길을 돌리는데 “집에 가먼 밥 읍써. 여그서 묵고 가”작은 엄마가 불러 세운다.
그나마 다행이다 싶어 한 자리 어쭙잖게 끼어 앉았다. 노란 양푼에 한가득 말아준 잔치 국수 위에 채친 애호박의 연둣빛이 싱그럽다. 멸치국물 냄새를 먼저 들이킨다. 호로록호로록 친구들과 경쟁하듯 먹고 나니 허기가 채워진다. 마루 앞쪽으로 춤꾼들이 그제야 보인다. 장구를 맨 옆집 아저씨와 꽹과리를 치는 혜경이 엄마, 불콰한 얼굴들에서 일에 찌든 모습은 사라지고 흥겨움에 겨워 마냥 즐기는 모습들만 피어나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너울너울 가락을 타는 몸짓과 부드럽게 구부렸다 펴는 손가락의 곡선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끼는데 아..! 우리 엄마다. 몸뻬 대신 분홍 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은 낯선 차림, 엄마가 이렇게 한가하게 놀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춤사위는 본 적이 없었다. 엄마도 춤을 출 수 있구나. 저렇게 분위기 있고 끼가 넘치는 분이셨구나. 겨울이 되기 전 내리박골에 가서 나무를 해와 허청 가득 채우는 일도 엄마가 했고, 논밭에 거름 내는 일, 바람벽이나 부뚜막에 맥질하기, 제사 때마다 닭 모가지 비틀어 잡는 것도 엄마 몫이었다. 웬만한 남자일도 거뜬히 해내는 작은 거인, 철인이라고 소문날 만큼 일이 몸에 밴 억척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노랫가락이 흘러넘치는 자그마한 체구가 물 만난 제비처럼 무아지경인 모습을 보며 엄마의 또 다른 모습을 훔쳐본 콩당 거림이 사나흘은 갔던 것 같다.
한가위를 하루 앞둔 어느 날, 도구통(절구)에 쌀을 찧고 체질하고 또 찧고 체질하여 쌀가루 한 층 팥 한 층 올린 떡시루를 가마솥에 올려놓고 찐다. 그 잉걸불을 모아 놓은 후 가마솥뚜껑을 뒤집어 올려놓고 배추 전을 시작으로 깻잎, 두부, 명태, 홍어 전과 산적을 부친다. 고사리, 시금치, 무, 콩나물 등의 나물류와, 홍합, 새우를 넣은 탕거리를 만들어 놓고 진안장에서 제일 큰 것으로 사 온 굴비, 들기름을 바르고 소금 한 꼬집 뿌려서 재운 김은 아침에 구울 것이다. 저녁 늦게까지 동동거리며 뛰어다니시던 엄마는 마지막으로 놋 재기를 다 꺼내 놓으셨다. 부엌에서 재를 한 바가지, 뒤꼍에서 모래도 한 그릇 퍼다 놓고선 그 많은 재기를 다 닦자 하신다. 감나무 위로 떠오른 달이 감나무 잎을 쪼르르 타고 내려오다가 우물을 들여다보고 다시 푸르뎅뎅한 놋그릇에 담긴다. 친구들은 진똘이 하러 가자며 담 너머에서 보채는데 나는 일에 파묻힌 엄마를 차마 떨치지 못해 마음만 부글부글 끓고 있었으니 그 놋그릇이 예쁠 리가 없다. 덜그럭 덜그럭 투덜거리는 손동작을 본 엄마는
“정성껏 닦아야 혀. 그래야 복을 받지. 어차피 헐 일인디 그렇게 투덜거리면 복 달어나.”
하면서 시범을 보이신다. 짚을 뭉쳐 만든 수세미에 모래를 묻히고 뱅글뱅글 돌려가며 싹싹 닦는다. 오른손에 힘을 주어 닦다가 씻어낸 후 다시금 재를 묻혀서 닦는다. 나는 건성건성 겨우 하나 닦다가 친구들을 찾아 학교로 뛰었다. 늦은 밤에 살그머니 들어서니 우물가에 말끔하게 씻긴 놋그릇들이 나란히 엎어져 있다. 놋그릇으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서럽게도 예뻤다. 그것들 사이로 귀뚜라미 울음 몇 조각 흐르고 별빛도 찬란히 박힐 것 같았다. “워뗘. 예쁘지?” 늦게 들어온 나를 책망하는 대신 부드러운 달빛에 녹아드는 마음을 나누어주시던 엄마가 다시금 소녀 같은 노랫말로 나를 적신다.
엄마가 하와이로 여행을 다녀오신 후의 일이다.
“미국 여자들은 늙으나 젊으나 똑같이 입술을 뻘겋게 칠허고 다니더라.”
하시더니 외출할 때면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시고 얼굴에 하얀 분도 두드리면서 “좀 더 이쁘냐?” 묻곤 하신다. 오늘도
“꽃놀이 가는데 우리 엄마도 예쁘게 단장하셔야지?” 하니
“다 늙어 쭈그렁망태 할매를 뭐 할라고 발라. 그게 그거지.”
하시면서도 얼굴을 내미신다. 토닥토닥 엄마의 고된 인생을 다독이듯 꾹꾹 눌러 바른다. 쭈글쭈글 바를 곳도 없이 작아진 입술에 큰 산을 하나 그린다. 거울을 보는 엄마 얼굴에 낙낙한 웃음 한 바가지 걸렸다. 아흔한 살 엄마도 예쁘게 보이고픈 여자인 것이다.
“엄마, 아버지 처음 봤을 때, 어땠어? 꽃다발 받아본 적은 있었어?”
”그때는 꽃이 지금처럼 흔했간디. 꽃은커녕 얼굴이 새까맣게 탄 느그 아부지가 참 무서워서 말 붙이기가 애로웠어”.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근디 지금 생각해봉게 꽃 같은 날도 있었네. 아마 느그 아부지가 면사무소 면장일을 그만두게 되고 낙심해 있을 때였지. 하지도 못하는 소꼴을 베러 갔다가 소꼴은 알량하고 대신 칡꽃을 한 묶음 묶어서 꼴망태에 달랑달랑 매달고 들어온 적은 있었지. 정지 문고리에 걸어 놓더라고. 별일이지.”
소여물통 앞에 멋쩍게 앉아 있는 아버지가 보인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흔들거리며 스카프를 펼치고 벚꽃을 받는 엄마의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고 싶어진다.
“엄마,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여름날 마당에 멍석 깔고 누워 있으면 엄마는 낮에 따서 고들고들해진 봉숭아꽃잎에 백반과 숯을 넣어서 손톱 위에 올려놓고 포도 잎으로 싼 후에 무명실로 꽁꽁 동여매주기도 했었지? 자고 일어나면 풀려버린 것들도 있고 너무 꽉 묶어서 손가락 끝마다 저리고 아린데 엄만 “참 곱다. 하도 고아” 하면서 우리 손을 쓰다듬어 주곤 했었어. 기억 나 엄마?”
"그렸냐? 몰라. 긍게... 그때 그렸는갑다잉..."
엄마가 태어난 지 삼만삼천이백십오일.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칠십구만 칠천백육십 시간이 흘러갔다. 이제 기억하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망각의 터널에 들어선 것이다. 새로 산 옷을 잘 둔다고 두고서 종일 농을 뒤지며 누가 가져갔나 보다고 두런거리신다. 학독(돌확)을 막둥이에게 주고서도 딸들이 가져갔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용돈을 받아서 어디에 두었는지 이 아들 저 딸 호출하신다. 결국엔 당신의 쌈지에 들어있는 것을 깨닫고선 “늙으먼 죽어야 혀.” 쓸쓸히 되뇌곤 하신다. 이십오 리 길 관촌장을 걸어서 다니시던 발걸음이 이젠 지척의 화장실 가기도 버겁다. 철인 권여사가 세월 앞에 속수무책 삐걱거리며 녹슬고 있다.
엄마가 갑자기 눈을 감고 조용하다. 스카프로 받았던 꽃잎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왜 아무 말씀을 안 하셔?”
“아이고 휘발유가 다 떨어졌어. 당최 기운이 없네.”
하하하 기억은 사라지는데 그래도 유머 감각은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새벽바람에 나왔으니 배가 고프신 거다. 서둘러 집으로 온 우리는
“우리 혜숙이가 끓여준 대수리국이 최곤디.”
입맛을 다시는 엄마 말씀 따라 국을 끓였다. 대수리를 여러 번 문질러 씻은 후 소쿠리에 놓고 물을 빼낸다. 국물을 넉넉히 잡아 된장 한 숟가락 넣고 끓이는 사이 호박을 채치고 마늘을 콩콩 다져 놓는다. 청량고추와 파는 송송 썰어 놓는다. 부르르 끓어오른 물에 물기가 빠져 혀를 내밀고 있는 대수리를 재빨리 넣는다. 자갈자갈 한참 끓으면 대수리를 건져낸다. 대수리 주둥이를 잡고 이쑤시개를 알맹이에 꽂아서 빙글빙글 돌리니 옥색의 알맹이가 똥까지 잘 딸려 나온다. 엄마는 “맛나다. 하도 맛나.”하시며 드신다.
“엄마, 나 어릴 때 대수리 먹으려면 탱자나무 가시를 식구 수대로 꺾어오라고 했지이잉?”
“아하? 그렸냐? 몰라”
“왜 몰라아. 생각나야지. 엄마가 한두 번 시킨 것도 아니면서.”
“약은 드셨어?”
“몰라. 긍게 먹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렇게 총명하시던 엄마가 요즘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교회 가는 날도 가물거려서 전화를 걸 때마다 “오늘 주일이냐?” 묻곤 하신다.
눈물이 맺힌 나를 보며 딸이 말한다.
“엄마가 말했잖아.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기억나무에 가서 맺히는 거야. 다시 작은 나무를 채우고 움 틔우고 꽃 피우는 거라고. 엄마가 말했잖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나무에 와 맺힌다.
전 고등학교 국어교사
현재 최명희 문학관 “혼불”읽기 프로그램 강사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