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가을을 추억하며
ㅡ2018년 가을의 일상을 꺼내본다.ㅡ
재잘재잘 어깨 위에 내려앉아 노는 햇살이 졸음을 가져오는 가을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신일이어서 학원 일을 다 미루고 친정을 향한다. 약수터를 지나니 빨강, 노랑 갈색의 가을은 가로수에 흥건하게 젖어 있다.
사십여 분을 달린다. 자동차 한 대가 간신히 다닐 정도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낮은 흙담을 타고 오른 호박넝쿨에 누런 호박덩이가 하나, 둘, 세 개나 있다. 담장 위에 얌전히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약호박도 단단한 빛깔을 내며 가을을 익히고 있다.
”엄마 “
꽃밭 앞에서 볕뉘를 쬐고 계시는 엄마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오늘도 엄마는 은행나무 아래서 소일하고 계셨나 보다. 젊은 날엔 노루목 고개 넘어 내리박골, 단지골, 골짜기마다 누비셨던 엄마셨다. 봄이면 취나물, 고사리를 뜯어 오시고 늦가을이면 땔감을 하러 봉황산, 알미산으로 뛰어다니면서도 힘들다고 안 하시던 엄마셨다. 이제 구순의 길목을 걸어가시는 엄마는 바깥출입을 어려워하신다. 무료함을 달래 줄 유일한 놀이터는 문간에서부터 뒷마당까지 이어져 있는 사십 여평 남짓한 꽃밭이다.
“막내야, 이 나무는 니 아부지 나무여”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에 심으셨다는 은행나무가 그늘을 펼치며 내려다보고 있다. 학생 때는 징코민이 들어 있는 은행잎을 팔아서 우리들 버스비로 쓰기도 할 만큼 물질로 보상을 해 준 나무이다.
“저 아래 있는 작은 은행나무는 엄마 나무이고”
암 수 서로 마주 보게 심어야 열매가 열린다며 심으셨을 젊은 날의 아버지가 노랗게 펼쳐진 그늘 아래서 피어난다. 은행나무 품에서 우리 나무들도 여전히 잘 자라고 있다.
“여그 앉아서 이렇게 보고 있으먼 하나도 안 심심혀. 느그들 어렸을 적 일들이 죄다 생각나거든”
팔 남매를 가르치려고 밤낮 논밭에서 살아야 했던 엄마셨다. 콩 한 포기 더 심으려고 땅 한 뙈기도 놀리지 않으셨다. 그런 엄마께서 이젠 힘에 겨워 울 안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더 많다. 구순을 넘어서면서 곡식 대신 나무나 꽃을 심고 가꾸신다. 사라졌던 함박꽃도 다시 살리시고 봉숭아, 맨드라미, 과꽃, 족두리 등을 철 따라 심고 즐기신다.
아버지가 심었던 것들도 살들히도 가꾸신다. 아버지는 제일 맏이인 큰언니를 생각하며 포도나무를 심으셨단다. 지금은 그 포도나무는 사라지고 다시 엄마가 심어놓은 포도가 지붕까지 타고 올라가서 열매를 풍성하게 선물하고 있다. 살림 밑천이었던 언니를 닮은 듯 큰 보살핌 없이도 잘 자란다고 기특해하신다. 화단 중앙에 큰 오빠를 닮은 소나무가 있다. 젊은 날에 세상을 떠난 그래서 엄마의 가슴에 묻혀 있는 오빠를 기리기 위해서 심으셨단다. 둘째 언니가 좋아하는 능소화는 담을 넘고 있고, 셋째 언니의 수국도 장독 곁을 지키고 있다. 늘 단단한 둘째 오빠를 위해 매실나무를 심고, 샘가에 심어진 감나무는 유난히 홍시를 좋아하는 내 나무이다. 하얀 앵두나무는 순수한 우리 남동생 나무이고, 쉰둥이,막둥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는 왕밤나무는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튼실한 열매를 준다. 어머니는 세상일에 쫓기며 사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자식들을 위하여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것들을 돌보신다.
그런데 삼 년 전부터 연분홍 상사화가 아련하게 피어나곤 한다. 처음엔 구근 몇 알에서 수줍게 피어오르던 것이 이제는 꽃밭 한쪽을 한 아름 꾸미고 있다. 먼저 떠나가신 아버지와 큰오빠를 생각하며 심으셨다는 그 꽃은 오빠가 떠나가신 계절,사월 말이면 어김없이 찾아오곤 한다. 끈끈이대나물과 패랭이는 피고 지고, 함박꽃과 난초는 이제 꽃은 다 지고 잎만 무성하니 남았다. 샐비어와 족두리가 작별을 하느라 몸살을 앓고 있다. 십 여 그루 옹기종기 둘러앉아 주홍으로 곱게 불을 밝히고 있는 등롱초, 어릴 적에는 꽈리라 부르며 갖고 놀던 꽃이 꽃밭을 지키고 있다. 엄마는 해마다 대롱대롱 달린 열매를 모아서 뒷마루에 주렁주렁 달아놓고선 기침, 해열을 다스리는 데 사용하시곤 했다.
“ 느그들은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이 꽃밭을 가꿔. 풀을 뽑으면서 옛날 야그도 허고 그랴. 봄이면 매화도 보고 매실청도 담고 여름날엔 풍혈냉천에 가 놀먼서 이 포도도 따 먹고, 가을이먼 서리 맞은 감을 따서 여그 항아리에 담아 놓고 겨울 내내 꺼내 먹그라.”
곧 떠나실 것처럼 뒷일을 당부하신다.
“느그들 웃음소리가 이 꽃밭에서 자로롱 자로롱 피어나먼 나도 저그서 함박웃음으로 웃을 수 있을 거시여 ”.
엄마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주렁을 짚고 은행나무를 기댄 엄마의 어깨 뒤로 봉황산을 넘어온 황혼이 붉게 물들고 있다. 철의 여인이라 불린 엄마, 앞마당 꽃밭으로 마실 나온 노을이 바튼 숨을 고르며 쉬고 있다. 구순 고개를 넘어가는 엄마에게 허락된 땅, 사십 여 평. 그것을 가꾸는 재미로 여생을 소일하시는 엄마. 감기는 눈에 매스틱처럼 투명한 눈물꽃이 영롱하게 열린다.